"상실의 시대"의 하루키, "분노의 포도"의 스타인백, "위대한 개츠비"의 피츠제랄드, 그리고 좀 더 넓게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헤밍웨이까지, 제2차 세계대전의 충격을 허무감으로 표현한 작가들을 전후작가, 그리고 이 세대를 일컬어 Lost Generation이라고 한다. 프랑소와즈 사강(Francoise Sagan)도 이 문학그룹 안에 포함되는 작가로써 19세에 처녀작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녀가 프랑스인이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점이다.

19세기는 이성의 시대였다. 데카르트로부터 발현되고 칸트와 헤겔에게 계승된 근대적 이성은 찬미와 숭배의 대상이었고, 이상향이었다. 근대적 이성은 과학을 낳았고, 프랑스 대혁명을 낳았다. 이성은 거칠 것이 없어보였고, 근대적 낙관론이 낳은 최고의 예술적 산물, 낭만주의와 에펠탑이 등장했다. 그들은 과학의 은혜로 인해 전세계를 누비며, 땅들을 점령하고, 그리고 끝없이 부유해질 것만 같았다. 헤겔은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가 역사적 변증의 마지막 과정이라고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19세기 중엽부터 근대적 이성에 대한 반작용이 나타났다. 니체와 바그너, 스메타나가 등장했으며, 낭만주의는 허무주의나 민족주의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인상주의라고 통틀어부르는 미술사조는, 허무주의가 결합된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간의 다툼이었다. 그들은 이성에 회의했고, 또한 집착했다. 고흐와 세잔느는 저물어 가는 근대성의 마지막 대표주자였다.

역사를 통해보면 재미있는 사실이 있는데, 사상의 균열은 경제적인 균열과 함께 한다는 사실이다. 19세기는 탐험가의 종말을 고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점령할 토지는 나오지 않았고, 근대적 이성의 피해자들은 부풀려진 환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깨닫기 시작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착각을 정확하게 지적했으며, '유럽에 떠돌던 유령'을 규탄했다. 경제공황과 제1, 2차 세계대전은 이성의 사망을 알리는 사건이었으며, 현대를 선포하는 신호탄이었다.


"Bonjour Tristesse" 영문초판본
출처: 위키피디아

프랑소와즈 사강은 이러한 이성의 절망 과정을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지켜보았다. 그녀는 "슬픔이여 안녕"을 통해 베르그송을 거듭 인용하며, 프랑스인으로서 대륙철학에 대한 애증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베르그송이 상대성이나, 인간의 감(수)성 등에 호의적인 형이상자라는 걸 감안하면, 사강의 이 집요한 애증은 "슬픔이여 안녕"을 꿰뚫는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여타 전후세대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사강 역시 자조적인 문체를 통해 전통과 개혁, 보수와 진보 사이의 허무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녀가 흥미로운 이유는 이 자조과정을 정반합의 변증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인공 세실과 그녀의 아버지 레이몬, 아버지의 약혼녀 안느, 그리고 세실의 남자친구 시릴르와 아버지의 옛 애인 엘자. 안느가 전통과 근대적 이성을 상징한다면, 시릴르와 엘자는 진보와 현대적인 감성을 상징한다. 사강은 이 사이에서 갈등하는 세실과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Lost Generation의 딜레마를 담아낸다.

"슬픔이여 안녕"의 도입부에서 세실과 레이몬은 근대적 이성에 대한 격렬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레이몬은 바람둥이이며, 깊이 생각하는 걸 거부하며,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다. 그런 레이몬이 엄격하고, 지적이며, 교양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안느와 약혼한다는 것은, 유럽이 가지는 근대성에 대한 향수라고 볼 수 있다. 레이몬의 모습은 소설 전반을 통해 이중적이다. 그는 딸 세실이 칸트와 파스칼을 인용할 때 실망감을 감추지 않으며, 안느와 결혼을 약속하면서도 애인 엘자의 아름다운 모습에 동요하기도 한다. 레이몬의 어정쩡한 태도와 우유부단은 소설 속의 혼란을 부채질한다.

세실 또한 감정에 솔직하며, 교양이나 학업성적 등에는 무관심한 17세의 여자아이이다. 하지만 레이몬과는 반대로 영리하며, 우유부단한 생각 속에서도 행동에 있어서는 재빠르게 묘사된다. 세실은 아버지의 약혼녀 안느에 대해서 존경과 경애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녀의 엄격함에 답답해하고 거부감을 드러낸다. 그녀는 겉으로는 안느를 잘 따르면서, 시릴르와 엘자를 이용해 두 사람의 결혼을 갈라놓으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세실은 죄책감과 자조, 자기정당화를 통한 방황을 보여준다.

세실과 레이몬이 가지는 기본적인 성격은 감성을 사랑하는 감성이지만, 인물 간의 역학관계 속에서 이들은 각각 감성을 사랑하는 이성과, 이성을 사랑하는 감성으로 변화된다. 이렇듯 인물설정이나 관계묘사에서 "슬픔이여 안녕"은 고전적인 변증법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세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정'은 엘자와 시릴르이며, '반'은 안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정'은 안느이고, '반'은 엘자와 시릴르이다. 이렇듯 프랑소와즈 사강은 인물과 관계묘사에서 변증법을 교묘히 교차하며, 이 상황에서 갈등상황을 유발한다.

'합'을 제시하는 과정은 비극적이고, 그러면서도 냉소적이다. 세실이 시릴르와 엘자를 이용해서 아버지 레이몬을 유혹에 빠지게 하는데에 성공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약혼녀 안느는 그들 부녀를 떠난다. 뒤늦게 후회한 세실과 레이몬이 안느에게 용서를 비는 편지를 쓰고 있을 때, 안느는 사고로 명운을 달리한다. 그리고 이 사고로 충격을 받은 세실은 시릴르와도 이별한다. 짧게 요약된 이 결론을 보면, 마치 비극과 안타까움, 슬픔과 회개가 교차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강은 인물이 받는 충격과 그에 이은 변화를 매우 담담하고 냉소적으로 표현한다. "슬픔이여 안녕"의 모든 해답과 주제, 결론은 마지막 몇 문단에 집약된다. 소설 끝부분의 세실과 레이몬은 도입부에서 보여주는 모습과 별반 달라진게 없다.

사강의 '합'은 마치 변증법을 비웃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정'과 '반'을 모조리 제거해버리면서, '합'의 회귀가 이루어진다. 이성을 상징하는 인물의 죽음에는 이성찬양의 근대성에 대한 신랄한 비웃음이 들어있다. 주인공 세실의 이성은 실수투성이였고, 또한 잔인했으며, 그리고 자기방어적이었다. 마치 19세기의 유럽이 숭고를 찬양함으로써만 자기합리화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처럼.

또한 사강은 감성을 일상이나 망각, 혹은 습관으로 치환했다. 이성이 글이라면, 감성은 말이다. 글에 대한 반성은 죽음처럼 충격적이지만, 말에 대한 반성은 헤어짐처럼 단지 한 번 되돌이켜 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이성이 사라지는 순간, 감성 또한 사라져야 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베르그송이 말년의 저작에서 제도와 규칙 등에 집착했던 것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리고 사강이 이 책에서 보여주는 해답 또한 일상이나 망각, 혹은 습관이다. 앞서 말한대로 세실은 '정'과 '반'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일상성을 회복한다. 갈등 자체가 제거되어 버리면 갈등이 해소된다는 이 단순한 생각은, 당시 사회가 가지고 있던 혼란에 대한 도피심리가 반영되어 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라는 속담이 떠오르게 한다. 슬픔과 충격에 대한 허무감. 사강은 '정'과 '반'을 함께 버림으로써 근대적 이성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환상을 동시에 부정한다. 일상 속에서 상실은 망각되고, 환상은 배신된다. 사강이 보여준 일상의 변증법은 인간에 대한 온정이며, 동시에 인간에 대한 냉소이다.




덧붙이는 글: 재미있는 사실은 사강의 또 다른 소설을 모티브로 삼은 일본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Josee, the Tiger and the Fish)"이 그녀의 소설과 매우 흡사한 설정과 전개, 어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남녀주인공이 중첩되면서도 다른 변증법적 구조를 보여주는데, 여자주인공(조제; Josee, 이케와키 치즈루)의 경우, 사강의 소설 속 대목이 복선처럼 깔리면서 '정'과 '반'의 소거를 암시하고 있다. 남자주인공(츠네오; Tsuneo, 츠마부키 사토시)의 경우에는 이성적인 '정'으로의 회귀 과정이 상식적인 관념에 의존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일상에 만연한 습속과 무감각에 대한 강한 비판을 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