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리세 판 하위텐(Carice van Houten). <블랙북(Black Book, 2006)>은 영화 자체만으로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로써 기억될만한 작품이다. 비록 모든 이야기축이 그녀를 향해있다고는 해도, 까리세 판 하위텐은 그 이상의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다가온다. 우아하면서도 퇴폐적이고, 연약하면서도 강인한, 화려한 것 같으면서도 수수한, 본래의 캐릭터 이상을 보여주는 표현력에 감탄을 하게 된다. 그녀의 연기는 정말 인생만큼 드라마틱한 게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블랙북>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한 유대인 여인(레이첼 역; Rachel Stein, 까리세 판 하위텐)이 겪는 이야기이다. 레이첼의 가족들이 유럽을 탈출하려는 장면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그녀의 가족들은 이 탈출에서 모두 사살당하고, 레이첼만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 자포자기하며 삶을 이어나가던 레이첼에게 레지스탕스들의 조직원들이 다가온다.

레이첼은 레지스탕스들과 행동을 함께 하며 지역에서 악명높았던 독일군 정보장교 문츠(Ludwig Müntze, 세바스티앙 코치; Sebastian Koch)에게 접근하여 스파이활동을 하게 된다. 레이첼과 문츠는 서로가 적이라는 것을 서서히 눈치채게 되지만, 또한 서로의 인간성에 반해가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다. 문츠를 사랑하게 된 레이첼은 그에게 레지스탕스를 도와줄 것을 권하게 된다.

믿었던 사람들의 배반, 그로 인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 이 영화는 살아남고자 하는 생존의 본능을 넘어선, 너무나도 죽음이 가까워 오히려 살아남아야만 했던 과정을 보여준다. 엔딩에 이르면 그녀의 일생은 마치 하나의 숙명처럼 느껴진다. 죽음으로부터의 도주 속에서 죽음에 맞서려 하는 필사적인 오기. 까리세 판 하위텐과 크리스티안 코치가 실제로 연인이라는 게 다행으로 느껴졌을 정도이다. 이 영화와 잘 어울릴 것 같은 어느 카피문구가 하나 기억난다.

'살아남기 위해 살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