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전 "은하철도 999(Galaxy Express 999, 1977-1981)"에 빠져 살았던 적이 있다. 언제봐도 대단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츠모토 레이지의 끝이 없는 상상력과 깊이는 때로는 무서울 정도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약점이라면 스토리텔링의 방식에 있다. 일본에서 뮤지컬로 제작될 정도로 연극적인 요소도 풍부하지만, 달리 말하면 그만큼 고전적이라는 해석도 될 수 있다. 때때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같은 해결사를 등장시키기도 하고, 중간 중간 얘기가 비약적으로 진행되기도 하는 등, 엄밀함이나 정밀함에서는 다소 부족해보이기도 한다. 이는 마치 희랍연극에서처럼, 어떻게 이야기를 진행하느냐보다는 어떤 이야기를 진행하느냐에 보다 중요도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작품에 대한 변호도 바로 여기에서 시작될 수 있다. 즉, "은하철도 999"에서의 과학은 '작품 안에서의 사실'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미있는 과학적 가설들과 비슷한 듯 하다. 득이 있으면 실이 있듯이, 마츠모토 레이지는 세세한 엄밀함을 포기한 대신 무한한 상상력이 담긴 우주를 창조해 낸 셈이다. 그리고 여기에 자신의 세계관을 스며들게 하는데에도 성공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시대를 관통했던 작품 중의 하나였던만큼 비평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물질만능주의와 기계주의에 대한 비판, 계급주의에 대한 비판 등은 "은하철도 999"를 언급할 때면 언제나 등장하는 단어들이다. 또한 주인공 철이(테쯔로)의 성장과정을 보여주는 성장소설적인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이나, 113편이라는 엄청난 분량과 전우주를 무대한 스케일 등도 자주 등장하는 수식어들이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마츠모토 레이지는 이 작품에서 더 중요한 의미를 집어넣은 것 같다. 그건 바로 '관성(Inertia)'이다. "은하철도 999"는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더블린 사람들(Dubliners, 1914)"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많다. "더블린 사람들"이 배를 타고 아일랜드를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묘사했듯이, "은하철도 999"는 기차를 타고 자신의 별을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묘사한다. "더블린 사람들"이 결국 배를 타지 못하고 아일랜드에 남게 되는 사람들을 보여주듯이, "은하철도999"는 결국 기차를 타지 못하고 자신의 별에 남게 되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의지는 관성에 의해 저지당하고, 사람들은 희망을 찾기 위해 몸부림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즐겨 사용하듯이, '기차'는 문명화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동시에 관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과학의 발명품이기도 하며, 또한 우주는 관성을 가장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다. 철이가 가지는 입장은 이중적이다. 기계인간이 되고자 했던 철이의 의지는 결국 가장 문명화된 기계몸을 주는 안드로메다의 계획에 의한 관성의 반영이었다. 우주를 방랑하며 각각의 별들의 관성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철이와 항상 문명화된 발명품인 기차의 관성 안에 있어야 했던 철이가 항상 동시에 존재한다. 철이의 부모님과 메텔도, 기계인간과 인간도 이와 비슷한 문명화된 관성과 그것을 깨려는 의지의 대립항들이다. 그래서 "은하철도 999"는 우울하다. 하지만 동시에 희망을 담으려 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묻는다면, 그 대답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숙제로 남아있다. 하지만 필자가 조심스럽게 답한다면 의지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의지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방향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학생이다', '나는 어디에 산다', '나는 무엇을 한다' 등등의 자신에 대한 수식어를 스스로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 의지이다. "은하철도 999"는 행복해지기 위해 자신의 삶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작품이며, 또한 그것은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