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부분은 일종의 주석으로, 읽지 않고 넘어가도 문맥을 이해하기에는 큰 지장이 없다.


도구는 도구일 뿐이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정보는 도구에 속한다. 정보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편린이며,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구라는 용어의 의미를 어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어떠한 것,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서 말이다.

도구는 아끼고 관리해야 할, 사람의 양태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부분이다. 단순히 의식주를 비롯한 여러가지 삶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물리적인 의미의 도구에서부터, 손과 발, 눈, 코, 귀, 입 등 신체를 관리하며 정보를 받아들이는 모든 기관들도 도구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뇌라는 것도 포함되는 것은 물론이요, 뇌가 관장하는 모든 정보들, 즉 생각이나 학문, 이성 등도 도구에 속할 수 있다. 순수한 감정의 처리조차도, 사회적 경험과 합의에 의한 정보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휴대폰은 쓰여지기 위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존재의 양태는 도구로 인해 지속되며, 도구라는 것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는 어떤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도구는 쓰여지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즉, 존재는 도구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을지언정, 도구 그 자체로 존재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도구를 쓰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심각한 문제가 나오지만, 이에 대한 해답은 명확하지 않다. 살고자 하는 의지, 혹은 본능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를 가진 존재라고 막연히 대답할 수 밖에 없다. 내키지는 않지만 칸트적 용어로써 Ding an sich, 즉 물자체가 가장 근접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의 말대로 추측할 수는 있지만 불가지하다. [그밖에도 무의식이나 원형(prototype), 혹은 데카르트적인 의미로써의 자아, 플라톤의 이데아 등이 이와 근접하다고 말할 수 있는 개념이며, 일상언어로 쓰는 용어 중에서는 영혼이라는 단어가 가장 근접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존재'를 규명하기 위한 대개의 시도는 신비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불가지의 선험성이 토대를 이루고 있다. 선험적이라는 단어는 매우 재미있는 한 수라고 볼 수 있다.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기초적인 어떠한 앎, 혹은 도구를 도구로써 파악할 수 있는 경험 없이 알 수 있는 어떠한 지식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 다 썩 내키지 않은 가정이기에,] 여기서는 단지 '그 어떤 존재'를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어떠한 존재라는 정도로 가장 좁은 의미의 가정만을 하고 넘어가려 한다. 왜냐하면 우선 이것은 몇 천년이나 이어져온 진리론에 관한 문제이고, 당연히도 그렇게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며, 그리고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짚고 넘어가기는 했지만, 애당초 제기한 질문이 도구에 대한 것이었지, 도구를 쓰는 자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문제를 그다지 만족스럽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 해소하였으므로 다시 도구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기로 하자. 앞서 말한대로 도구는 단지 사용되는 어떤 것일 뿐이다. 아무리 아끼고 관리해야 하며, 존중받아야 하는 것일지라도, 그 자체로 존재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구조주의의 실패는 바로 이 부분에 있었다. 도구로서 존재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이러한 몇몇가지 시도는 도구에 홀린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무리한 설명이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수비학과 같은 것이 좋은 일례인데, 수비학은 '수'라는 도구에 홀려, 어떠한 진리를 상징으로 바라보고자 했던 시도였다. 비록 그 끝을 알기가 힘들다고는 하지만, 인간의 지식과 도구는 결국 한정적인 것이고, 이러한 한정을 어느 정도나마 극복하기 위한 수단 중의 하나가 상징이다. 상징이란 그 자체가 가지는 의미 속에서 파생되는 의미 줄기들을 뜻한다. 상징은 아주 오래된 전통을 가지고 있고, 문학적인 메타포, 혹은 심리적인 연상작용을 도구로서 가지고 있다. 인간의 지식 중에서 가장 잘 정리된 체계를 가진 수와 그 자체로써 상당한 가능성을 내포한 상징의 만남은 더할 나위없이 매력적인 것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완벽한 도구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는 법, 불완전한 두 도구 간의 만남은 강력했지만, 상징으로 인해 지나치게 신비화되었고, 수라는 것이 가진 특색 덕분에 정형화라는 한계 또한 명확했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수비학이 도구의 하나로 정착되었지만, 수비학이 처음 목표했던 '도구로서 존재를 설명하고자 했던 시도'는 도구에 홀린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만 일깨워준 채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탑승객의 숫자 중 하나일 뿐일까?>

수비학과는 다른 방법이지만, 수로써 현상을 파악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통계학은 수비학과 반대의 길을 걸었다고 볼 수 있는 도구적 방법론인데, 수비학과 같이 어떠한 진리를 설명하고자 하는 도구가 아니었음에도, 때때로 수라는 도구에 홀리게 하는 일례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매력적이고, 편리하며, 가장 기초적인 도구를 사용할 때는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 통계적 확률로써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한시적 현상에 관한 일반성이지, 그 자체로 명약관화한 확고한 사실이나 진리가 아니다. 실제로 통계는 사실이나 진리에 대해서는 어떠한 의문도 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통계는 참/거짓을 판별하는 척도가 아니라, 단지 현상을 측정하는 척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통계치에 따라 '그 어떤 존재'의 판단기준을 성립하는 것은 유사성에 의한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실패할 수 밖에 없는 노력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유사성(Family Resemblances)'이나 롤스의 '중첩적 합의(Overlapping consensus)'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통계학도 도구의 하나인만큼 불완전할 수 밖에 없고, 실질적으로 상식이란 개념의 붕괴에는 통계학에 바탕을 두었던 사회학의 한계와 큰 연관을 맺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현대적인 의미의 상대성이라는 개념이 이해를 도울 수 있겠지만, 글이 너무 방대해질 것 같기에 이 정도로 상기만 시키고 넘어가려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기본적인 도구이자, 가장 위험한 도구인 언어에 대하여 집고 넘어가보자. 언어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도구에 속한다. 현대사회에서는 본능의 영역에 속하는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도 언어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언어는 현대의 학문적 흐름에 있어서 핵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또한 일상적으로는 가장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는 도구이기도 하다. 언어는 (헌)법과 더불어 인간이 만들어낸 도구 가운데에서 가장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사회적 합의를 존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일상언어적 사용에 있어서 사회적 합의를 법과 같은 강제성을 요구하려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심지어는 언어를 너무 지고한 위치에 둔 나머지, 이것이 도구이기에 앞서 '그 어떤 존재'로 파악하고자 하려는 시도도 있다. 하지만 언어는 하나의 불완전한 도구일 뿐이며, 가치평가는 가능할지라도, 강제적인 의무를 부여할 수는 없다.


<신문 속의 활자들은 사실만을 말하는가?>

가장 놀라운 일상언어의 오해는 그것이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도구가 완전하기 위해서는 추가의 보완이 필요없다는 가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미 언어 속에 존재하는 외래어는 언어의 불완전성을 증명하는 데에 충분한 요소가 된다. 또한 과거의 언어가 현재의 언어와 완전한 호환이 불가능하듯이, 현재의 언어만으로 과거나 미래의 언어를 완벽하게 번역할 수는 없다. 게다가 언어가 완벽하다면, 만약 두 개의 언어가 서로를 번역한다고 했을 때, 적어도 둘 중 하나는 상대언어에 대해 완벽한 대응을 이룰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불가능하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져있다. 언어의 사회적 합의는 크게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작게는 세대와 연령, 속해있는 집단에 따라 당연히 다른 것이며, 따라서 어떤 하나의 언어를 쓰는 이가 자신의 언어를 다른 이에게 강제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며, 또한 그다지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리고 이러한 오해에서 파생되는 또 다른 문제는 언어가 도구라는 것을 더러 망각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흔히 언어는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표현한다. 꼬투리를 잡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표현 안에는 언어가 도구라는 사실을 내재하고 있으면서도, 가치평가적인 문제를 진리적 문제로 보이게 하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 언어는 일상언어적으로 영혼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 어떤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한 요소이다. 그리고 실질적인 진리치에 관한 문제는 단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그 어떤 존재'를 구성하는 언어를 비롯한 여러 도구들을 통해 나타나는 정합성 사이에 있다. 즉, 옳다/그르다식의 표현은 수많은 도구 사이에서 드러나는 '그 어떤 존재'를 단편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는 정합성에서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지, '그 어떤 존재'가 사용하는 언어라는 도구에 쓸 수 있는 표현은 아니다. 어떤 개인이 사용하는 언어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사회적 합의를 통한 더 바람직한 사용에 대한 가치평가일 뿐이다. 그리고 예외적으로 명백한 언어적 오용, 예를 들면 '나비'라는 단어를 '집'이라는 의미로 쓰는 경우와 같은 언어사용의 실패 경우를 포함한다. 즉, 일반적인 개인의 언어사용에 할 수 있는 비판이란, 더 좋다/더 나쁘다의 비교평가와, '~해서는 안된다'식의 타당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내포한, 일반적으로 언어의 바른 사용이라고 일컫는 예들, 단어의 정확한 의미사용과 기본적인 문장구성 등에 한정된다.

도구는 단지 도구에 불과하다. 이런 도구에 대한 섣부른 당위성 제기는 '그 어떤 존재'가 도구를 통해 발산하는 다양성을 가로막는다. 또한 '그 어떤 존재'가 사용해 온 도구들의 발전에는, '그 어떤 존재'가 도구 그 자체의 불완전성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사용과 색다른 개발에 기초하고 있다. 경계해야 하는 것은 도구의 새로운 확장이 아니라, 도구에 마음을 빼앗기고 거기에 홀리는 것이다. 도구가 어떠한 정의(justice), 내지는 존재적 당위성을 내포하려고 할 때는 반드시 다양성의 파괴 뿐만 아니라 정신의 파괴를 수반한다. 도구가 영혼에 사용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영혼이 도구에 사용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