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신이 창조되고 있었다. 전염병의 재앙은 선한 자와 악한 자, 신심이 깊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가리지 않았고, 풍요로운 대지의 결실은 더 이상 사람들을 충분히 먹이지 못했다. 믿음이 부족해서라며 스스로를 탓하던 사람들은 견고한 침묵으로 일관하는 신에게서 천천히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세상은 그 자체로 조화롭다는 섭리에 대한 믿음. 그동안 믿어왔다는 사실 이외의 어떠한 설득력도 잃어버린 신과 함께 사라져버린 건 바로 그러한 믿음이었다.

(…) 언어는 사유의 분석, 즉 (…) 기본적으로 공간에 질서를 정립하는 활동이다. (…) 말하기, 가르치기, 알기는 엄밀한 의미에서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
-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말과 사물", '4. 말하기', 민음사, p.136, p.144

사람들은 이제 세상을 전처럼 이야기하지 않았다. 푸코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과 "돈키호테"에서 그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작지만 근본적인 변화를 관찰해낸다. 이는 신에게서 인간으로, 무한성에서 유한성으로 향하는, 곧 인식틀의 변화이다. 현상은 비록 크게 달라진 점이 없이 연속적으로 보일지라도, 그 현상을 말하고 해석하는 방식이 바뀐 것이다. 언어가 변화하면 언어로 구성되는 분류체계 또한 변화한다. 인간은 이제 신이 빚어낸 토기가 아니라 생명이 되며, 대지의 풍요로운 선물은 노동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누군가의 말씀이 아닌, 인식 토대로써의 언어의 존재를 눈치채게 한다.

인간은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말로 생각을 표현하면서, 언어적 형태의 역사적 중요성을 의식하지 못하는데도 사유를 언어적 형태로 둘러싸면서 자신의 뜻대로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말의 요구를 따른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 '8. 노동, 생명, 언어', p.412

생명과 노동, 언어는 푸코가 역사의 가장 중요한 단절선으로 지목하는 19세기 초, 새로운 신으로써 구체화된다. 그러나 그 입지는 위태로웠다. 생물학은 생명과 비생명을 구분하는 절대적인 기준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에, 경제학은 노동이 아니라 평가가 가치를 결정한다는 사실에, 문헌학은 어떠한 말인가보다는 오히려 누가 말하는가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곧 직면해야 했던 것이다.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외침은 단순히 종교적 선언만이 아니었다.

(…) 시간 속에서 생겨나고 아마도 시간 속으로 사라질 모든 사물의 한가운데에서 인간은 모든 기원으로부터 분리된 채로 이미 현존한다.
- '9. 인간과 인간의 분신들', p.455

푸코의 저술이 중요한 이유는 현재의 의미체계가 여전히 19세기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명과 노동, 언어가 더 이상 그들의 숭배자인지와는 무관하게, 충분히 먹여주지도 못할 뿐더러, 그동안 믿어왔다는 사실 이외의 모든 설득력을 상실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에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신인 것일까?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인간의 인식이 언어로 이루어지는 한, 결국 언어의 유의미성에 대한 고민 이외의 또 다른 출발점을 찾을 수 있을까. 내용 없는 기호를 현실로 가득 채우기. 이를 위해선 나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말로 생각을 표현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작업부터 해야할지도 모른다.

(…) 돈키호테는 이야기의 내용 없는 기호를 현실로 가득 채워야 한다. 그의 모험은 세계에 대한 독해, 즉 책이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형상을 온 세상에서 찾아내려는 세심한 행로가 된다.
- '3. 재현하기', p.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