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곡한 지면 안에다 풍부하다 못해 차고 넘치는 담론을 쏟아부어놓은 아서 단토의 "일상적인 것의 변용"을 딱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그는 현대에 들어 이미 진부하고 낡은 개념으로 간주되는 '표현'을 되살리려고 한다.

예술이란 곧 표현(이다.)
- 아서 단토 지음, 김혜련 옮김, "일상적인 것의 변용", '7. 은유, 표현, 그리고 스타일', p. 349, 한길사, 2008.

그에게 표현이란, 예술작품으로써의 의도를 지니고, 수사를 비롯한 각종 기술을 활용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은유적 구조를 지닌 내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복잡하고 어려워보이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플라톤에서부터 디키에 이르는 수많은 철학자, 미학자들 사이에 가교를 놓기 위해 '표현'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재현을 위한 기술적 모방으로 예술을 정의한 플라톤에 대해서도 '그것이 예술로 의도되었는가'라는 의도성을 '표현'에 도입함으로써 한계를 지적하는 동시에 예술의 기본적 속성으로써 그의 이론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표현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예술은 표현이지만, 표현 자체로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그는 예술작품은 이를 인정하는 예술계에 의해 예술작품이 된다는 디키의 이론을 이끌어온다. 즉 예술은 예술로써 의도되고 예술로써 해석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예술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계의 인정만을 예술작품의 필요조건으로 보았던 디키의 견해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표현이라는 개념을 통해 역시나 그 한계를 지적받게 된다.

해석없는 관찰은 없다.
- 같은 책, '5. 해석과 동일시', p. 277

예술가와 예술계, 그렇다면 이 둘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수용자(혹은 감상자)가 없다면 아무리 훌륭한 예술도 빛을 발하기는 어렵기 마련이다. 이를 위해 그는 칸트를, 그리고 비록 직접적으로 인용되지는 않지만, 여러모로 수잔 손탁 등을 연상케하는 논증으로 이끌어간다.

예술의 '의미'는 수용자에게 받아들여지는 과정에 있어서야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이는 수용자가 얼마나 많은 지식이나 경험을 갖고있는가 내지는 직관력, 심미안, 취향(칸트적 용어로는 취미taste)등으로 구별되는 개인적인 차원, 어떠한 시대 혹은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역사적인 차원, 이 둘 모두에 의해 결정되어진다. 아서 단토는 해석이란 곧 독해라고도 할 수 있는 의미수용의 중요한 과정으로 이해하며 비평과 해석을 명확히 구분지음으로써, 있는 그대로 예술작품을 느끼라는 수잔 손탁의 견해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을 시도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아는 만큼 보인다로 요약할 수 있겠다. 또한 이러한 해석의 한계는 예술가의 의도나 예술계의 수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작용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일상적인 것의 변용"의 궁극적인 질문은 결국 예술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다. 그렇지만 아서 단토는 '이런 것이 예술이다'라고 딱 잘라 말하는 대신, 기존의 예술이론의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합당하다고 판단된 부분들은 받아들임으로써, 과연 예술이란 것은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는 여러 조건들을 모아나간다. 그래서 그의 논의는 비록 일관적이지는 않지만 대단히 풍부하다. 명확한 틀이 보이지 않아 때로 답답하기는 해도, 흐릿한 윤곽이 아주 천천히 제모습을 드러내며 다양한 생각의 여지를 남겨놓는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어렵고 골머리를 썩힐 뿐더러, 어쩌면 무용하기까지하다는 데에는 틀림이 없다. 비록 그렇더라도 여전히 이에 답하려는 노력을 포기할 수 없다면, "일상적인 것의 변용"은 훌륭한 지침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



덧붙임 1.

발매되자마자 오역논쟁(로쟈의 저공비행/블로그)이 있었던만큼 다소 주의깊게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옮긴이의 각주가 지나치게 부족하다는 것도 아쉬운 부분. 앞서 언급한 수잔 손탁을 비롯, 비트겐슈타인, 존 롤스 등 직간접적으로 인용되는 수많은 철학자, 미학자들의 개념에 대한 주석이 거의 없기에(더러는 본문에서도 설명되지 않는다), 예술과 철학, 양쪽에 걸친 상당한 배경지식이 없이 펼쳐들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보다 폭넓은 독자들을 위해 좀 더 신경쓰고 배려해야했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덧붙임 2.

(전략) ... 우리는 모델을 그가 - 또는 그녀가 - 표상하는 인물 자신인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그림으로 그려지고 촬영되는 등 예술가가 직접 묘사하는 대상은 바로 모델 자신이지만 그가 곧 그림의 내용인 것은 아니다. 만일 모델이 너무나 잘 알려진 인물인 까닭에 동일성의 잠식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모델은 잘못 선택된 것이다.
- 같은 책, '7. 은유, 표현, 그리고 스타일', p. 344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 왜냐하면 현재의 대중문화를 잠식한 스타시스템 속에서는 작품 속의 인물과 그(녀)를 연기하는 실제의 인물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때로는 심지어 그 실제의 인물을 위해 작품이 만들어지고 수정되는 경우마저 있으니... 아서 단토의 견해에 따르자면 유명인에 의존하는 예술은 '결코 좋은 예술이 될 수 없다'. 물론 이는 대중문화 뿐만 아니라 어떠한 예술, 더 나아가 고전에 있어서도 해당되는 이야기.


덧붙임 3.

(그러므로) 모방에서 얻는 쾌는 사람이 공상에서 얻는 쾌와 동일한 종류에 속하는데, 공상가에게는 자기가 즐기는 것이 공상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현실인 것처럼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히 인식된다. 때때로 공상가들은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공상이 끔찍하거나 가학적일 경우 실제로 자신들이 끔찍하거나 가학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실제로 대부분의 공상가들은 공상에 대응하는 현실을 두려워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도 가장 혐오하는 동물들을 볼 때는 겁을 먹지만 동물들을 그린 그림은 실물을 닮을수록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리가 그 동물들을 좋아한다는 것이 함축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물론 즐거움의 일부는 즐거움을 경험하는 상황이 현실이 아니라는 지식 때문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했듯이 그 지식은 우리가 모방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므로, 현실 상황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지식은 쾌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주제를 바꾸었을 뿐이다.
... (중략) ...
어떤 사람이 참으로 그 사물 자체의 현전을 마주한다는 그릇된 믿음을 갖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왜냐하면 외관상 어떤 것도 변화된 것이 없고, 다만 현상과 실재의 관계에 관한 그 사람의 개념이 변했기 때문이다.
... (중략) ...
그러나 분리의 규약들이 관객에게 확연히 알려져 있는 한, 모방 자체는 사실상 그러한 규약 없이도 활성화될 수 있는 믿음을 차단한다. 그렇다면 모방적 예술가들을 극단으로 몰고 가서 적합한 괄호 안에서 제시되어야 할 어떤 것이든 현실에서 접할 수 있는 것과 아주 흡사하게 만들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규약이 관람자들에게 올바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라는 확신이다.
- 같은 책, '1. 예술작품과 단순한 실재적 사물들', p.91-106'

지나치게 긴 인용이기는 하지만, 또 하나의 흥미로운 대목. 이에 따르면, 예를 들어 예술작품의 폭력성으로 인해 범죄를 일으킨다든지, 혹은 아청법에 깔려있는 관념들이 예외적 현상을 얼마나 과도하게 일반화시켰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겠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영화를 보고 범죄를 저지른다면 그것은, 그(녀)가 영화와 실제를 구분하지 못하는 그릇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가끔씩 그런 사람들이 있기도 하다는 것, 딱 그것만을 증명할 뿐 그 이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