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이 미국에서 여성으로 태어났더라면, 아마도 딱 이런 느낌의 작품을 했을 것만 같다. "윈터스 본"은 잔인하다. 대놓고 피가 살이 튀기는, 그런 장면 따윈 하나도 없는 데에도, 섬세한 감정선과 치밀한 화면구성만으로도 그런 느낌을 들게 하는 데에는 모자라지 않았다.

다 허물어져 가는 집, 그 안에선 돌리 가족이 살아가고 있다. 마약제조 혐의를 받는 아버지는 가족을 내버려둔 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어머니는 말 그대로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17세의 한 소녀가 그런 집의 생계를 이끌어간다. 아직은 너무 어린 두 동생들의 부모노릇도 물론 그녀의 몫이다.

어렵사리 버텨가던 그녀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져온다. 집을 담보로 보석금을 낸 아버지가 어디론가로 잠적해버리고, 덕분에 그런 허물어져 가는 집조차 압류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소녀는 결심한다. 어떻게든 아버지를 찾아야겠다고. 이대로 거리로 나앉을 수는 없다고.

이 영화에는 수많은 상징들이 등장한다. 이것이 미국이라는, 다른 어디도 아닌 미국의 이야기라고 말하려는 노력이 곳곳에 흩어져있다. 다 허물어져 가는 집부터 이미 상징은 시작된다. 그녀의 부모도 한때는 꿈많고 열렬히 서로를 사랑했던 연인이었다. 하지만 빛바랜 사진첩은 그들의 비참한 현재와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기념품에 불과할 뿐이다.

아버지를 찾는 과정에서 협박을 당하고 린치를 당하는 소녀의 입에서는 시시 때때로 "나도 돌리예요."라는 말이 흘러나온다. 언제 길바닥으로 쫓겨날지 모르는 가족의 처지이다. 그런데도 그녀의 자긍심, 아마도 유일하게 남은 자긍심의 출처는 무너져가는 집의 좋았던 한 때를 향한다.

그녀는 현재이다. 좋았던 부모세대는 케케묶은 과거로써 이미 죽어버렸다. 그녀가 그렇게 지키려 애쓰는 집도 언제 무너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낡은 폐가나 다름이 없다. 공부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동생들을 다독여도 보지만, 미래는 미래일 뿐, 현재의 그녀조차 어떻게 살아남을지는 막막하기만 하다.

그녀는 동생들에게 총을 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그녀는 군대에 입대하려고 한다. 어린 아이들조차 살아남기 위해 총을 들어야 하는 세계는 언제나 존재해왔다. 그런데도 그녀는 '나도 돌리예요'라는 말에서 자긍심을 느낀다. 미국인이라는 단어가 여전히 그들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듯이.

"윈터스 본"에서 등장하는 상징들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겠지만, 정말 스치듯 지나가는 하나의 깃발만큼은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Springfield.

참 묘한 느낌이다. 미국에는 수많은 스프링필드가 있으니 과도한 해석이라는 점은 우선 전제하고, 심슨 가족이 다섯 명이었던 것처럼 그녀의 가족 역시 다섯 명이다. 심슨 가족이 미국을 상징했던 것처럼 그녀의 가족 역시 미국을 상징한다. 어쩌면 데브라 그레닉 감독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우리가 잘 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이용해왔죠. 하지만 이제 우린 비참해졌어요. 아마도 앞으로는 더더욱 나빠져만 가겠죠.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스스로를 조롱거리로 삼으며 웃을 수만은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잘 살기 위해 괴롭히고 이용해왔던 바로 그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