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미국에서 열린 어느 사회학 학술 대회에서 '사랑'이 '애모되는 대상에 의해 야기되는 애모하는 감정의 상호성에 관한 강제적이고 강박적인 공상을 특징으로 하는 인식적이고 감정적인 상태'라고 규정했다. 이런 식으로 삽을 '삽'이라고 부르는 대신 굳이 '수동식 토양 재구축 장비'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현학적인 말이고, 현대 영어에 내려진 가장 큰 저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영어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성은 좋은 '동시에' 나쁘기도 한 기만적인 복잡성이다. 영어에서는 어떤 것도 겉보기처럼 간단치 않다. what이라는 간단한 단어를 예로 들어 보자. 우리는 이 단어를 매일 쓴다. 정말이지 두어 마디 가운데 한 번씩은 이 단어가 들어갈 정도다. 하지만 어느 외국인에게 이 단어의 뜻을 설명한다고 가정 해보자.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서도 무려 1만 5000개의 단어를 사용해 다섯 쪽에 걸쳐 그 뜻을 설명하고 있다. 영어 원어민의 경우, 영어가 얼마나 복잡하고 비논리적인 언어인지를 가만히 생각해 볼 기회가 거의 없다시피 한 상황이다. 매일 별 생각 없이 수많은 단어와 표현을 사용한다. 때로는 그게 무엇을 표현하는지,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생각해 보지도 않고 말이다.
- 빌 브라이슨 지음, "유쾌한 영어 수다", '전 세계의 언어', 박중서 옮김, 휴머니스트, p.21

묘하게 레이건이 연상되는 일러스트가 찍힌, 지극히 미국책스러운 표지부터 심상치가 않다. 아마도 이렇게 말해야할 것 같다. 지금까지 본 모든 언어(학)과 관련된 책 중에 가장 유익하고 유쾌했던 수다였다고.

영문학이라는 이상한 전공을 한 덕에, 정말 원하지 않게 언어학과 관련된 책을 접해야만 했던 시절이 있었노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겠다. "유쾌한 영어 수다"는 여러모로 유용하고 '실용'적이다. 영어몰입교육으로 고통받는 학생들에게는 영어도 언어라는 사실을 일깨워줄 뿐더러, 통사론이니 음운론이니 따위로 사실상 영어를 해부해놓은 언어학에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영문과 학생들에게도 적극 권장해줄만 하다. 심지어는 영어를 배우고자(?) 현재에도 불철주야 토익, 토플, 텝스, 뭐 그런 영어시험에 모든 것을 거는 분들께도 이 책은 영어에 대한 깊은 이해를 늘려줄지도 모른다. 어쨌든 결국 중요한 건 이거다. 영어도 언어라는 것. 그리고 언어란 결국 사람들이 쓰는 말이라는 것.

제법 진지한 투의 글에서조차 질문을 빙자한 악명높은 비꼬기는 어쩔 수가 없는가 보다. 빌 브라이슨은 '영어란 이런 것'이라며 젠체하는 높으신 분들에게 입술을 들짝거린다. 노력은 가상한데, 그게 정말 가능하긴 하겠어요? 라고. go의 과거형은 왜 goed가 아닌지, get의 분사형은 got인데 왜 forget의 분사형은 forgotten인지, 짜장면이 자장면이었다가 짜장면이 된 것처럼 올바른 철자법이나 발음이라는 게 또 무엇인지, 초서와 셰익스피어까지 들먹이며 반론을 펼쳐대는 해박함에는 절로 혀가 나온다. 십자말과 욕설, 이름 등 학문에서는 비교적 인정받지 못할 예외들에 이르면 영어는 이런 거야라고 규정지으려는 모든 노력이 애달파보이기만 한다.

이 정도쯤은 미드를 보면서도 늘 느끼는 것이긴 하지만. "빌 브라이슨의 유쾌한 영어 수다"에는 적어도 한 가지의 교훈은 남긴다. 영어를 못하는 건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 심지어는 영어 원어민(솔직히 그냥 네이티브라고 하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니 한심하기만 하다. 모든 언어에는 원어민이 있으니까)라고 해서 꼭 제대로 영어를 한다는 보장이 어디있을까. 토익만 해도 영국식 영어와 호주식 영어 등으로 수험생들을 괴롭힐 뿐더러, 앞뒤가 맞지 않는 기괴한 문장들을 쏟아내는 기사들도 모두 한국어 원어민의 글들일지어니...

물론 어떤 책이나 그렇듯, 그도 옳은 소리만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의 뻘소리들을 적당히 처리해내는 각주가 있으니 어느 정도는 안심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