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또 하나의 뮤지컬.

"헤어"와 같은 해에 등장한 "올 댓 재즈"를 보다보면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어쩌면 1979년은 섹스와 약물로 마음껏 스스로를 파괴할 수 있었던 마지막 해가 아니었을까, 뭐 그런. 물론 딴 나라의 이야기이다. 물론 그 나라도 이후로는 아이디어로 위장된 상업과 주류없는 주류로 완연하게 접어들기는 했다.

"올 댓 재즈"는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상당히 실험적이다. 또 다시 '물론' 오늘날의 기준이라는 것 자체가 미친 척 앞뒤 가리지 않고 내지를 수 있는 자유를 잠식해서는, 슬슬 눈치를 살피며 적당히 맞춰가야하는 수준으로 끌어내리기는 했지만, 어쨌든, 지나치게 실감넘치는 표현이 일상화된 현재의 영화들에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도발성만큼은 그리 찾아보기가 쉬운 것 같지는 않다.

쓸데없는 서론은 그만 각설하고, 밥 포시는 이 영화에서 스스로를 비웃는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비웃음은 어느새 예술을 향한 비웃음이 된다. 그러다보니, 어느샌가 삶을 비웃게 되고, 또 죽음마저도 결국 조롱을 피할 수가 없다.

"올 댓 재즈"는 지독한 허무주의를 위한 무대이다. 경쾌한 음악과 춤, 그 사이로 파고드는 돈과 명예, 완전성에 대한 강박, 마치 내일이 없을 것처럼 마셔대는 각성제, 목욕할 때조차 피워대는 담배와 밤마다 바뀌는 애인들, 또 술, 마음 깊이 품은 젊은이들의 꿈, 다정한 연인의 걱정과 사랑스러운 딸, 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과 부정, 분노, 협상, 절망, 수용의 복잡다단한 심리로써의 죽음, 밥 포시는 그 모든 순간들을 향해 허탈하게 웃음짓는다. 그래서 그게 다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 거죠?, 라며.

하지만 그는 끝까지 체념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허무하기에, 오히려 삶에 대한 애착은 더욱 절박해진다. 마지막으로 내뿜는 숨 한 모금에서조차 겹겹이 쌓아올려온 삶의 조각을 더 보태려고 한다.

허무를 알면서도 체념할 수 없는 인간, 아마도 밥 포시에게 인간이란 그런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즐거움을 위해 살든, 성공을 위해 살든, 행복 혹은 희망을 위해 살든, 아니면 생존 그 자체를 위해 살든, 어떤 삶이든 마침표는 있다. 아무 것도 아니라면 어떤 것이든 아무 것도 아닐 수도, 혹은 모든 것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