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에 대하여"는 성급하지 않다. 쉽게 결론을 내리려고 하지도 않을 뿐더러, 이야기의 전개는 사회의 선입견과 편견을 향해 집요하고도 조심스럽게 도전을 한다. 그리고 엔딩크리딧을 올라갈 때쯤이면 이 작품이 케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은 "우리는 이야기해야만 한다We need to talk about"이다.

현대사회의 광기는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가. 린 램지는 아무런 이유가 없는 범죄가 점차 늘어가고 있는 현대사회 자체를 관찰하려고 한다. 무언가 경악스러운 사건이 터졌을 때마다 어김없이 반복되는 언론의 호들갑, 그리고 뒤이어 따르는 사람들의 분노와 공포, 그리고 이에 또 뒤따르는 강력한 법적 제재와 점점 커져만 가는 서로에 대한 불신, 그리고 또 마치 이를 비웃듯 다시 반복되고야 마는 경악스러운 사건, 감정없는 연쇄살인마부터 상대를 가리지 않는 총기난사사건에 이르기까지 현대문명사회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에 들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유 따윈 없어. 그게 중요해. There is no point. That's the Point.

무엇이 이러한 사건을 반복되게 하는가. 싸이코패스라는 용어가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본래 타고난 인성 때문인가, 아니면 자기 삶에 바쁜 부모들의 무관심과 부주의 때문인가, 소위 낙인효과라고 이야기되는 어떤 한 개인에 대한 편견어린 시선 때문인가, 자극적인 TV나 대중문화가 원인인가, 그도 아니면 익명화된 사회에서 유명인이 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인가.

린 램지는 흔히 미디어에서 이런 사건들의 원인으로 이야기하는 모든 가정들을 이 한 편의 작품 속에 쏟아부어버린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시원스러운 해답처럼 느껴지지가 않는다. 린 램지의 관찰어린 시선이 더욱 이상한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은 단순히 저런 '미치광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에서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온통 토마토로 범벅이 된 사람들로 시작되는 오프닝부터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위압감을 지니고 있다. 틈틈히 흘러나오는 유행가의 가사조차도 마치 무언가 섬뜩한 광기를 예고하는 것처럼 들린다. "케빈에 대하여"에서 케빈이 결코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미치광이는 어떠한 한 특별한 개인으로 머무르지 않고 현대사회 그 자체로 자꾸만 번져나간다.

가족은 더 이상 개인들을 통제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허울에 불과해져가고 있다. 사회를 통제하는 법제도 거의 매일같이 무능과 실패만을 하염없이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그것도 나쁜 짓이야라고 일관하는 현대사회는 역설적으로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린 것만 같다. 그리고 어느샌가 살아간다는 것은 공포가 되어버렸다. 린 램지가 "케빈에 대하여"에서 요구하는 건 이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 하나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