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 시즌스Four Seasons의 'Big Girls Don't Cry'란 노래가 귓전에서 아른거린다. 발랄하고 경쾌하고, 왠지 코웃음이 나오는, 잠에서 억지로 깨어나야 하는 출근길에 마시는 커피같은 이야기.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건지, 아니면 정신을 놓게 하는 건지,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찬바람으로 횡행한 요즘 날씨와도 참 잘 어울리는 것만 같다.

자, 여기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둘은 수십 년간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들은 제각각의 가족, 친구, 동료와 함께 전혀 별개의 추억을 쌓으면서 살아왔다. 각기 다른 삶의 궤적을 걸어온 그 남자와 그 여자가 어느 날 처음 만난다. 호텔 커피숍에서, 정장을 떨쳐입고, 서로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암호명처럼 숙지한 채 말이다. 그들은 매우 정중하고 약간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수인사를 나눌 것이다. 그리고 불과 얼마 뒤, 그들이 영원한 법적, 경제적, 성적, 정서적 공동체가 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이 그들의 가족, 친구, 동료에게 전해진다.
믿어지는가? 이것이 내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시시각각 일어나는 일이었다. 짐칸 가득 돼지들을 싣고 가는 트럭과 광화문 한복판에서 마주치는 것보다 더 비현실적이고 불가사의하지 않은가!
- 정이현, "달콤한 나의 도시", '2부 선택의 시대', 문학과 지성사, p.69

후반부로 갈수록 긴장감이 떨어지고 다소 느슨하니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들이 있긴 하지만,
착하니 감기다 못해, 아주 척하니 들러붙는 날것의 화법은 이 책을 정답게 만들어준다. 평범함을 지상과제로 살아가는 여자, 오은수. 비굴함과 자존심을 오가는 자신의 기특한 현실감각을 변명할 줄 아는 여자, 오은수. 외로움에 치를 떠는 주제에 '현재 스코어'라며 이리저리 재고 따지길 멈추질 않는 여자, 오은수. 한 번쯤 마음 가는데로 하고도 싶지만 그럴만큼 뻔뻔해지지도 못하는 한 여자, 오은수. 31살의 이 여자... 정말 못났다.

적당한 원룸에 적당한 일상, 적당한 직장살이에 걸맞는 적당한 가방끈과 적당한 옷차림, 적당한 가족으로부터 이어받은 적당한 외모, 딱히 빠지는 것도 없지만 딱히 빼어난 것도 없이 늘 그렇게 이어질 것만 같은 무사안일에도 위기가 닥쳐온다. 평범함으로 가장된 각자의 비밀들. 적당한 냉소와 빈정거림으로 보호되던 그녀의 평범함은 어느샌가 비밀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산산히 바스라지고 만다.

쿨한 척, 강한 척, 냉정한 척 하는 그녀의 혼잣말들. 가슴 한 구석이 짠해진다. 솔직하지 못한 그녀의 진솔한 이야기.

"달콤한 나의 도시", 서울은 쓸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