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뚱하고 산만한 꿈결 같은 이야기.

아마도 보르헤스의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딱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다. "집시의 시간"은 환상과 사실이 끊임없이 엉켜드는 미로와도 같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집시들의 음악과 춤이 어지로움을 더한다. 대화를 하다가도, 싸움을 하다가도, 음악이 흐르면 모든 것이 멈추어버린다. 흐느적흐느적 춤을 추다보면 또 어느샌가 익숙한 골목이다.


사회의 하층부 중에서도 가장 아래. 끊임없이 이어지는 음악 위에서 살아가는 "집시의 시간"에서 주인공은 없다. 빈곤한 살림살이에 남은 거라곤 정과 체념 뿐인 할머니, 병원에 갈 돈이 없어 퉁퉁부어오른 다리의 아픔을 참으며 지내는 소녀, 하루하루 노름빚만 늘려가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는 삼촌, 양친을 잃고 가진 것도 없이 사랑하는 여인의 집 앞을 서성이기만 하는 청년, 이들의 이야기는 일직선으로 흘러가는 서사적 시간이 아닌, 끊임없이 헤메이다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고야 마는 동그란 미로가 된다.

미로 속에선 어떤 일이 일어나도 놀랄 것이 없다. 삶이 웃음거리가 되어버리면, 현실과 환상은 더 이상 다를 것이 없어져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