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avery! Slavery!. . . (detail), 1997
Collections of Peter Norton and Eileen Harris Norton
출처 : artnet.com



카라 워커 (Kara Walker) : 더 많은 작품보기

1969년 캘리포니아 스탁튼 출생의 미디어아티스트.

구름이 드리운 달빛 아래, 말을 탄 왕자님이 꽃을 든 공주님을 찾아나선다. 호수 곁에서 겨우 만난 두 남녀는 서로의 얼굴을 맞대고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기에 여념이 없다. 카라 워커의 작업은 마치 한 편의 그림자 인형극을 보는 듯한 첫인상을 남긴다. 흑백의 실루엣 사이로 솟아오르는 이야기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녀의 이야기 틈틈으로 불편한 장면들을 목격할 수 있다. 말을 탄 왕자님과 꽃을 든 공주님의 손끝은 노예의 목줄로 이어지고, 그리고 달빛은 일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부끄러이 밝혀놓는다.

카라 워커의 작업들은 정서적인 상충감을 준다. 스타일이 주는 첫인상과 그녀의 이야기는 당혹스러울만큼 멀찍한 거리를 지니고 있다. 그녀는 동화의 틀 안에 역사적인 맥락을 이어붙인다. 아니 동화적 틀 자체를 역사적 맥락으로 바꾸어낸다고 말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그림자가 지닌 검은색은 그 자체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자신의 정체성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은 관조, 역동적인 관조를 일으킨다. 예술 작품을 접하는 이가 작품 안에 있는 것을 일시나마 자신의 실제 삶과 동일시하면서 자극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의 반응은 - 예술작품을 예술작품으로 대하는 한 - 궁극적으로 분개나 찬동을 넘어서는, 초연하고 평온하고 감정의 동요 없이 관조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수잔 손탁, "해석에 반대한다", 이민아 옮김, 이후, p. 53)"

하지만 이상하게도 카라 워커의 작업을 바라볼 때면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를 부르는 김완선이 떠오르곤 한다. 물론 이상한 연상작용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굳이 이유를 찾자면 바로 위에 인용한 수잔 손탁의 견해로 설명할 수 있을 듯 싶다. 그녀를 춤이 아닌 가사로 기억하는 이는 과연 얼마나 될까. 이렇게 바꿔말할 수도 있겠다. 음악에서 과연 가사가 담당하는 역할은 얼마나 될까. 수잔 손탁의 견해는 현대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을 정확하게 집어낸 것만 같다. 그리고 이는 현대예술이 지닌 한계에 대한 이야기이자 또한 변호나 다름없기도 하다.

여전히 예술에서 무언가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들은 심심치 않게 있고, 또한 오로지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는 예술가들 역시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서도 관조를 피할 수는 없다. 카라 워커와 같은 예술가의 경우엔 여전히 '표현의 문제'로 말하고, 수잔 손탁과 같은 평론가의 경우엔 '심적 거리'라고 말하는 이 관조의 문제는 예술에서 책임을 분리시키고 그리고 바로 그 덕분에 삶에 다가가고자 하는 예술가들의 열망을 아주 손쉽게 무너뜨리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예술은 예술일 뿐이라는 것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고, 만화는 만화일 뿐이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

덕분에 현대예술은 다소 난처한 상황에 처해있는 것처럼 보인다. 의미는 무의미하게 보여야만 한다. 카라 워커는 현대예술의 지향점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예술가가 아닐까 싶다. 그녀는 스타일로 거리를 만들며 이를 하나의 전략으로 활용한다. 하지만 또 다른 반대편에선 무의미가 의미를 얻어가며 예술의 가치를 가격표로 메겨가고 있기도 하다. 오해의 문제는 아예 미학의 관심사에서 제외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20세기 전반까지 이어진 근대예술의 오만을 다시 보고 싶은건 아니지만 때때로 '술 마시며 사랑 찾는 시간속에 우리는 진실을 잊고' 사는 게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