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홍차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 가장 처음 듣게 되는 명칭이 바로 얼그레이이지 않을까 싶다. 얼그레이 백작 이야기서부터 베르가못향이 어쩌구 저쩌구하는 이야기들은 홍차를 소개하는 어지간한 글의 서두로 자주 인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하지만... 그런 사전적인 이야기들과는 달리 얼그레이만큼 오해가 많은 차도 없는 것 같다. 전부라곤 할 수 없겠지만 각종의 브랜드에서 출시되는 각종의 얼그레이들을 마셔오다보니, 도대체 얼그레이라는 단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마저 생겨버렸다.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지닌 실론이나 다즐링, 아쌈, 기문 등과는 달리, 각양각색의 브랜드만큼이나 각양각색의 색채를 지닌 얼그레이는 그만큼이나 오해로 가득한 홍차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준비했다. 한 잔의 얼그레이로 단호히 '난 얼그레이는 별로인 것 같아'라고 하는 친구를 위해, 그 많은 얼그레이들 사이에서 방향을 잃어버린 친구를 위해, 아마드부터 로네펠트까지 13종의 (얼)그레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안타깝게도 아직 마셔보지 못한 웨지우드와 니나스, 위타드, 트와이닝스에서 출시되는 4종의 얼그레이를 제외하곤, 아마도 현재 시중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모든 얼그레이에 대한 시음기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1. 클래식한 얼그레이 : 딜마, 아마드, 아크바



얼그레이라고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브랜드라면 역시 아마드가 아닐까 싶다. 커피전문점에서 가장 흔하게 취급하는 브랜드이기도 할 뿐더러, 또한 개인적으로도 가장 처음으로 마셔본 홍차가 바로 아마드 얼그레이이기도 했다. 사실 아마드나 위타드와 같은 브랜드는 거의 홍차계의 표준이라고도 할 수 있기에 설명하기가 무척 어렵기는 하지만, 클래식한 분위기와 약간 남성적인 느낌을 주는 얼그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울러 홍차를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가장 먼저 권하는 차이자, 또한 약간만 짙게 우려내도 향수를 마시는 것처럼 약간은 부담스러울 수 있는 민감한 차이기도 하다. 만약 조금만 향을 덜어내고 싶다면 잉글리쉬 브랙퍼스트 쪽을 추천.

그리고 딜마의 경우에는 위 사진의 아래처럼 2종류의 제품을 접할 수 있다. 오른쪽의 클래식 시리즈의 얼그레이는... 정말 짙다. 아마드가 남성적이라면 딜마 얼그레이 클래식은 거의 마초수준에 가깝다고나 할까. 그래서 처음엔 상당히 부담스럽지만, 한 번 맛이 들리면 빠져나오기 힘들 정도로 강한 중독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가격이 무척 저렴한 편이라는 것도 장점. 반면 T-시리즈의 얼그레이는 포장만큼이나 상당히 산뜻한 편으로 만약 얼그레이를 처음 접한다면 가장 먼저 추천해주고 싶은 차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느 쪽을 선택하건 딜마의 얼그레이는 정말 중독성이 강하다고 말해둬야 할 것 같다.

아크바의 경우에는 클래식한 얼그레이 중에서는 가장 가벼운 마음으로 선택할 수 있는 홍차일 것 같다. 레몬향이 살짝 감도는 향은 그다지 부담스럽지도 않을 뿐더러(딜마 클래식을 마신 후 바로 아크바를 마시면 정말 산뜻하게 느껴진다), 가격 역시 가장 저렴한 편. 헤비드링커(?)라면 하나쯤 모셔놔도 후회가 없을 듯(?)




2. 과일향의 얼그레이 : 티센터 오브 스톡홀름, 웨지우드, 다질리언, 트와이닝스


만약 클래식한 얼그레이가 영 입맛에 맞지 않는다면 과일향이 샘솟는 얼그레이들쪽으로 눈을 돌려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아마도 이쪽에서 가장 유명한 브랜드라면 트와이닝스가 아닐까 싶다. 여성분들에게 가장 사랑받는(혹은 그렇다고 알려진) 브랜드이기도 하다. 레이디 그레이의 경우엔 오렌지향과 레몬향이 달콤하게 어우러져 편안한 느낌을 준다. 트와이닝스의 얼그레이 역시 평가가 좋은 편으로 클래식한 얼그레이에 부담을 느낀 분들이 많이 찾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오래되면 눅눅한 향이 나기에 포장을 뜯고 가급적 빨리 처리해야 한다는 게 아주 사소한 단점이라면 단점일 것 같다.

그리고 웨지우드의 와일드 스트로베리 시리즈 중 하나인 얼그레이 플라워는 러블리한 차 중의 하나로 꼽고 싶다. 웨지우드에서 나오는 차들은 전반적으로 순한 향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나 얼그레이 플라워는 장미향과 딸기향이 은은하게 어우러져 느긋한 오후의 티타임을 제대로 살려주는 차가 아닐까 한다. 와일드 스트로베리 시리즈는 마치 전원의 풍경을 그대로 가져놓은 듯한 특색을 지니고 있기에, 호기심이 많은 여성분들에게 특히 권하고 싶다.

티센터 오브 스톡홀름의 얼그레이 스페셜은 지금까지 마셔본 홍차 중에서 단연 이색적인 느낌을 주는 홍차였다. 시트론향이 상당히 짙은 편. 상큼한 향과 고소한 맛이 재미있게 어울린다. 또한 아이스티용으로도 가장 먼저 생각나는 차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질리언 얼그레이의 경우엔 마치 츄잉껌을 씹는듯한 강한 단향을 지니고 있다. 과일홍차와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면 비추, 아니라면 OK.




3. 사색적인 얼그레이 : 테일러 오브 헤로게이트, 할센 앤 리온, 파트리지


만약 스모커이거나, 이러저리 삶에 지친 분들이라면 이쪽은 어떨까 싶다. 테일러 오브 헤로게이트와 할센 앤 리온의 얼그레이는 다소 스모키한 느낌을 지니고 있다. 다행히도 랩상쇼우총처럼 다기를 위협할 정도로 강하지는 않고, 벽난로 옆에 있는 듯 따스한 향이 인상적이라 개인적으로 혹독한 겨울날이면 가장 먼저 찾게 되는 얼그레이이도 하다. 둘 간의 차이라면 테일러 오브 헤로게이트의 향이 조금 더 묵직한 편이다.

그리고 파트리지의 얼그레이같은 경우엔 옅게 깔린 청포도향이 마치 기문을 마시는 것만큼이나 단아한 느낌을 준다. 아마도 책을 좋아하거나, 낚시를 좋아하는 분들에게도 잘 어울릴만한 선택이 될 것 같다.




4. 얼그레이? 얼그레이! : 하니 앤 손즈, 로네펠트


하니 앤 손즈와 로네펠트의 얼그레이는 홍차와 다른 차와의 경계를 허무는 차로 불러야 할 것 같다. 정말 특이하게도 우롱차와 블렌딩된 하니 앤 손즈의 얼그레이는 특이한 배합만큼이나 향보다는 맛으로 먼저 다가오는 홍차이다. 녹차는 맛으로 마시고 홍차는 향으로 마신다는 속설에 매우 동의하지만, 하니 앤 손즈의 얼그레이를 마시는 순간 꼭 그런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반발효차와 발효차의 만남, 홍차의 향이 도저히 부담스러운 분에게도 이 차만큼은 예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로네펠트의 스페셜 얼그레이 역시 루이보스가 베이스가 된 매우 특이한 홍차(?)이다. 루이보스가 베이스이다보니 카페인이 없고, 또한 루이보스 특유의 풍부한 향과 붉은 수색을 매력으로 꼽을 수 있다. 물론 디카페인 커피도 커피냐는 질문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홍차의 분위기를 풍기는 허브티를 찾는다면 혹은 허브티 같은 홍차를 찾는다면 로네펠트 스페셜 얼그레이는 단연 손꼽을만한 선택이 될 것 같다.

아, 원래는 이리 길게 쓸 생각이 아니었는데, 예상 외로 길어져버렸다. 처음에도 이야기했듯 웨지우드와 니나스, 위타드, 트와이닝스의 얼그레이를 아직 접해보지 못해 아쉽다. 순한 느낌의 웨지우드, 향기로 승부하는 니나스, 문안하고 일상적인 위타드, 라이트한 느낌의 트와이닝스가 지닌 각 브랜드적 특성이 그대로 스며들어있지 않을까 추측만 할 뿐. 참고로 여행 중엔 립톤의 얼그레이 티백도 예상 밖으로 좋은 편이다. 홍차 피플이 조금이라도 늘어나서 더 이상 수입이 되지 않는 비극적인 사태들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길 기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