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딸, 그리고 예비사위라는 관계만 빠졌더라도 괜찮았을 영화.

전세계를 경악으로 몰아넣었고, 여전히 진행중인 금융위기를 소재로 잡은 것 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시종일관, 특히나 엔딩에서 가족으로 해답을 찾아가는 모습은 전혀 올리버 스톤 답지가 않았다.

월스트리트의 위기를 탐욕보다는 일종의 중독으로 묘사한 점에서는 신선했지만,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와 함께 시작되었던 신자유주의 경제의 한 켠에 가족주의가 공고히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모를 사람도 아니건만 왜 하필 다시 가족이란 카드를 꺼내들었는지는 의문이다. 그가 가족이란 요소에서 주목하려했던 것이 소박함이 주는 행복이라고 이해해보려고 해도, 역시나 다소 억지스런 전개는 본래의 비판의식마저 의심스럽게 만들어버린다.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금융위기에 대한 상당히 흥미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구제금융에 대한 분노는 본질적으로 실패를 향한 분노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 만약 월스트리트가 실패하지 않았더라도, 그들이 평균 직장인의 344배에 달하는 수익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월스트리트"에서 제시하는 올리버 스톤의 해법보다는 마이클 샌델의 질문이 보다 핵심을 찌르는 것 같다. 문제는 사람들이 가족이나 소박한 행복을 잊어가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의 시장경제의 결과물인 과도한 부의 집약인 듯 하기 때문이다. 마이클 샌델도 잠깐 언급하고 또한 여러 신문에서 등장하듯(금융위기 장본인들의 '뻔뻔한 고해성사', 해럴드 경제, 2010. 3. 10 / 꾹 참던 월가 "잘못한 것 없다"…금융개혁 반발, 한국경제, 2010. 4. 10), 사실상 금융위기의 핵심에 있던 사람들은 이러한 패닉상황을 수많은 성공 뒤의 하나의 실패 정도로 생각하는 듯 보인다. 여기에서 난점이 발생한다. 탐욕이든, 중독이든, 혹은 만용이든 이는 시스템적인 요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이 시스템이 얼마나 건전한가, 그리고 그 시스템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올바른가이기에, 단순히 특정한 가치 하나만으로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은 일종의 도피 내지는 문제회피에 불과한 듯 생각된다.

사람이 시스템을 만들고, 그리고 시스템이 다시 사람을 만든다. 물론 가치의 문제는 여전히 시스템의 건전성을 판단하는 데 가장 주요한 고려요소라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올리버 스톤의 해답은 성급했다. 차라리 다큐멘터리적인 형식으로 금융위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다양한 시선들로 지금의 시대를 돌아보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