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마드리드 근교의 공항에서 한 남자가 성냥갑으로 미션을 받는다. 알 수 없는 암호로 채워진 종이쪽지. 그는 항상 에스프레소 2잔을 시키고는 종이쪽지를 삼겨버린다. 두서도 없이, 어쩌면 산만한다고 말할 수 있는 <리미츠 오브 콘트롤(The Limits of Control, 2009)>에선 짐 자무시 감독 특유의 장난기가 영화 전반을 채운다. 하지만 하나의 대사, 그저 계속해서 우스꽝스럽게 반복되는 것만 같았던 대사엔 의외의 진실이 숨겨져있었다.

"스페인어 못하죠? (You don't speak Spanish, right?)"

<리미츠 오브 컨트롤>은 영화라는 하나의 가상공간 안에 실제현실의 세계가 불현듯 드러난다. 짐 자무시 감독은 영화 속에서 히치콕과 오손 웰즈, 고다르의 영화들을 오마쥬하며 현실과 가상 간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 현실의 모습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일까. 어쩌면 하나의 미술작품 속에서 현실의 가장 깊은 진실을 찾아볼 수 있는건 아닐까. 음악과 영화, 예술, 과학, 환각 등이 차례로 등장하며 스스로를 변론한다. 그리고 <리미츠 오브 컨트롤>에서 이들은 결코 현실에 대한 모사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일단 인물설정부터 예사롭지 않다. <리미츠 오브 컨트롤>의 배역들은 각자 자신이 맡은 역할 뿐만 아니라, 실제의 국적이 영화의 완성도에 핵심적인 부분으로 작용하게 된다. 두 명의 프랑스인에게서 암살미션을 부여받은 아프리카 흑인계의 주인공. 그는 여행길에서 스페인인의 음악을 듣고, 영국인의 영화와 예술을 보고, 일본인에게서 과학을 배우고, 멕시코인과 이스라엘인에게서 환각을 체험한다. 그리고는 벌거벗은 미국여성의 유혹 앞에서 단호하게 말한다: "총은 안돼, 휴대폰도 안돼, 섹스도 안돼."

미국, 그리고 세계. 짐 자무시는 <리미츠 오브 컨트롤>을 통해 미국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세계를 압축해낸다.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나온 주인공에게 반복되는 질문 "스페인어 못하죠?"는 단순히 언어에 대한 질문이 아니다. 미국의 백인들이 구사하는 '영어'는 세계를 좌우하는 하나의 헤게모니이자, 또한 그들이 지닌 오만의 상징이기도 하다. 영화는 마치 마법의 언어처럼 "모든 것은 주관적이다(Everything is subjective)"를 되내이며 "당신의 상상력과 재주를 동원하라(Use your imagination and your skills)"는 주문을 건다. 총기와 휴대폰, 섹스에 대한 주인공의 거부는 단순한 개인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는 돈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드는 오만한 미국의 상업문화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나 다름없다.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묘지에 가봐야만 한다. 묘지에서 그는 한 줌의 먼지에 불과한 삶의 모습을 볼 것이다. (He who thinks he is bigger than the rest must go to the cemetery. There he will see what life really is: a handful of dirt.)"

한 소절 기타연주를 위한 찬가. 어디에도 절대적으로 옳은 기준 따위는 없다. 인간은 결국 인간에 불과하고, 진실은 저마다 개개인마다 다른 모습을 하고 있기 마련이다. 다른 이들이 아무리 스타벅스가 최고라도 말하더라도 이름없는 조그만 카페에서 마시는 한 잔의 에스프레소에 더욱 더 마음이 끌릴 수도 있고, 다른 이들이 아무리 헐리우드가 최고라도 말하더라도 볼거리라곤 하나도 없는 소박한 영화에서 더욱 더 큰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인간의 마음은 통제되지 않는다. 정적이지만 묘한 긴장감을 지닌 <리미츠 오브 컨트롤>은 환상의 이면에 농도짙은 삶의 다양성을 투영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