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채희, refrigerator, 장지에 채색, 162.2×260.6cm, 2009

일시 : 2010.08.18~2010.08.31
장소 : 미술공간 현

소박한 고민의 흔적. 정신없이 시끌벅적한 마트 안에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단편들이 지나간다. 지나가는 아주머니는 카트 안에 휴지와 양파, 당근, 돼지고기 등을 담은 채 감자 한 알 한 알을 꼼꼼하게 뜯어보고 있다. 또 젊은 부부는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우유, 간식거리를 채우고는 시식코너를 떠날 줄 모른다. 옆의 친구는 온통 맥주와 라면, 인스턴트 음식을 쓸어담기에 여념이 없다. 진열대 위에 올려진 상품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카트 안에 담겨지는 순간, 상품들은 한 사람의 구성물이 되어 인생의 한구석에 조그맣게나마 자리잡는다.

비록 시장의 변화에는 많은 비판의 의견이 있고, 또한 공감할만한 것이지만, 여전히 장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눈에 띄게 얇아진 지갑에선 여전히 한숨이 흘러나오고, 아이가 졸라서 혹은 눈길을 돌릴 수 없어 외면할 수 없었던 상품은 마음 한 켠의 묵직한 무게가 된다. 박채희 작가는 딱히 대단할 것도 없는 일상적인 행위, 장보기에서 한 개인이 지닌 관심과 감정, 그리고 삶을 조용하게 바라본다.

선택된 관심, 과장을 지우는 색감. 박채희 작가의 화폭 속에서 상품은 더 이상 스스로의 장점을 과장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작가 개인의 취향을 반영하듯, 진열대는 흑백의 주조 아래 절제된 색감을 띈다. 어떤 상품인지는 별로 중요치 않다. 디테일은 과감하게 생략되고, 마치 시선의 움직임을 따라가듯 필치는 자연스럽게 상품의 윤곽을 따라가며 농도를 달리한다. 저마다 화려한 색상을 발하던 마트의 현기증은 산뜻한 개인의 정서로 탈바꿈된다.

평온한 일상에 대한 자유로운 시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 마냥 일상적인 소재를 다룬 <장보기>는 제목만큼이나 편안함이 좋은 전시이다. 감상을 강요하지도, 설득하려 들지도, 자기자랑을 늘어놓지도 않는다. 그래서 신선하다. 작가는 마트의 상품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 안에서 자기다움을 발견한다. 각박한 삶의 틈바구니에서 아주 조금 떨어져선, 스스로의 삶을 가다듬는다. 무언가를 억지로 이해해야 할 필요 따윈 없다. 인생이 단조롭고 지루하게만 느껴진다면, 박채희 작가의 전시는 충분히 좋은 선택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