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 이르러서 예술이라는 단어는 흔해빠진 미사여구로 전락한 느낌이 든다. 이제는 어떠한 일에 종사하는 어떠한 누구라도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서슴없이 예술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을 즐기고 있는 시대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예술이라는 개념의 범주 또한 마치 정신분열증에 걸린 것처럼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게 되었던 것이다. 예술의 아우라는 영화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고, 연이은 TV나 만화의 거센 입김은 예술이라는 단어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가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컴퓨터라는 강력한 매체의 등장은 마지막으로 남겨놓고 있던 예술의 자존심마저 송두리째 빼앗겨 버릴 위기로 몰아넣었다. 예술이 점점 대중화·보편화되어가면 갈수록, 그에 따라 점점 조잡스러워지고 자본의 힘에 더욱 더 큰 영향을 받아왔다.

에코(Umberto Eco, 1932~)의 저서 "열린 예술 작품: 카오스모스의 시학(Opera aperta)"에서는 대중 속으로 파고드는,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중 속으로 함입되어 가는 예술에 대한 연구를 담고 있다. 에코는 예술가와 대중 사이에 놓여진 다리를 확장하려 하며, 존립위기에 빠진 예술에게 새로운 위치를 정립시켜주려 노력한다. 에코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잘 보여준다:

" … 미학은 현대문학의 기본적인 요구 중의 하나를 부각시키는 한편 초안을 떠올리는 순간부터 작업의 전 과정을 지배하는 작업기준과는 무관하게 모든 미학적 작품의 체험과정에 내내해 있는 잠재적인 가능성도 함께 드러내준다. ... "진행적인 작품"의 시학이론 또는 실천은 특히 이러한 가능성을 주목한다. 동시에 공개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현대 과학의 여러 방법론의 논리나 흐름을 함께 결합해 이미 미학이 창작과 해석 행위의 일반적 조건으로 인정한 바로 그 흐름을 예술창조를 위한 실질적 프로그램으로 옮겨놓는다. 따라서 이 시학 체계는 '열림'을 현대 예술가와 수용자들의 근본적인 가능성으로 본다. … "(움베르토 에코, 조형준 옮김, 열린 예술 작품: 카오스모스의 시학, 새물결, 1995, P.70-71)

에코의 기본적인 생각 아래에는 해석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예술작품의 끝없는 창작의 진행상태에 대한 가능성이 깔려있다. 이러한 에코의 생각은 그동안 크로체 등에 의해서 미학적, 해석학적 전통이 어떠한 해석의 표준을 제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던 것과 반대로 예술의 해석에 대해 상당히 파괴적인 다양성을 부여하려는 시도가 짙게 깔려져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의 "여행의 책"이라든지, 저서에서도 예를 들고 있는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의 "책"과 같은 작품들은 분명히 이전에 가져왔던 어떠한 해석 방법으로도 분석되기 어려운 작품들일 뿐만 아니라, 개개인에 따라 다른 '체험'을 가지게 하는 "진행 중인 작품"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여행의 책"은 처음 펼치는 순간부터 독자들에게 자신이 말하는 대로 따라줄 것을 당부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의 음성을 들으며 독자 개개인의 기억 속 영상을 이끌어내도록 함으로써, 독자마다, 아니 동일한 독자일지라도 읽을 때마다 전혀 다른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져 있다. 딜타이(Wilhelm Diltey)의 말 그대로 삶을 삶으로써 이해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며, 이는 에코가 말하고자 하는 기본요지와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이 추구하는 지점과도 교차하는 것이다.

에코는 대중을 예술의 한 주체로 부각시키면서, 자연스럽게 예술에서 대중에게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재미'라는 요소를 중요하게 간주한다. 그렇기 때문에 에코는 "스누피에게도 철학은 있다(Apocalittici e integrati)"에서 "스누피(Snoopy)"라는 만화와 "007"시리즈와 같은 오락영화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기도 한다. 대중과 함께 하는 예술에 대한 그의 생각은 칼럼모음집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예의 젊고 매력적인 여인이 다가와서 가마우지에게 위스키 한 잔을 권했다. 가마우지는 이런 말로 그 권유를 거절했다.
' 아마도 나의 미각은 아직 독한 술에 익숙해져 있지 않을 겁니다. 이 술은 석유 맛이 날 것 같군요.'
누군가 이제 비행기를 탈 시간이 되었다며 가마우지를 불렀다. 가마우지는 머리를 숙인 채, 반질반질한 바닥에 금방이라도 미끄러져 넘어질 듯한 조마조마한 걸음걸이로 기름 자국을 남기며 멀어져 갔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나를 돌아다보았다. 나는 이렇게 소리쳤다.
'고맙습니 다. 특히 전 세계의 어린이들을 대신해서 감사드려요." (움베르토 에코, 이세욱 옮김,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열린책들, 1999, P.170)

"이렇듯이 포르노 영화는 불법 행위를 그리는 데 꼭 필요한 정상적인 상황을 관객들이 느낄 수 있을 만큼 표현해야 한다. 그래서 만일 질베르토가 버스를 타고 A지점에서 B지점으로 가야 한다면, 실제로 그가 버스를 타고 A지점에서 B지점까지 가는 장면을 낱낱이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입에 담기 어려운 천한 장면들만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그런 시간 낭비에 짜증을 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그릇된 생각이다. 한 시간 반 동안 오로지 그런 장면들만 본다면 아무도 견뎌 내지 못할 것이다. 쓸데없는 공백시간이 필요한 것이 바로 거기에 있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영화관으로 들어가라. 만일 배우들이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이동하면서 여러분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늑장을 부린다면,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포르노 영화이다." (움베르토 에코, 이세욱 옮김,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열린책들, 1999, P.178)

그에게 열린 예술작품이나 기호학이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러한 것들이 대중에게 여전히 유익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해주었던 두 장편 소설, "장미의 이름(Il nome della rosa)"과 "푸코의 진자(Il pendolo di foucault)"는 그의 지식과 생각이 모두 동원된 대표작들이다. 그는 작품에서 진지함을 견지하면서도 대중들을 포괄하는 데에도 실패하지 않았다. 에코는 이 작품들 속에서 현대의 가장 큰 화두에 대하여 질문을 하나 던진다. 작품의 주인공들이 현실에 대한 개연성을 가지고 끊임없이 추구했던 추론, 좀 더 확장시킨다면 진리가 결국은 우연에 의한 가상에 지나지 않았냐는 것이다. 가상과 실제의 혼합, 이것이 곧 포스트모더니즘의 끝에 서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라는 점에서 그의 지적은 충격적이다.

이러한 에코의 생각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곧 전통적 예술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을 가능하게 했고,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나 에셔(Maurits Cornelius Escher),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앤디 워홀(Andy Warhol) 등의 아방가르드(Avant-garde)-팝아트(pop art)에서 보여진 예술의 일상화 혹은 일상의 예술화 전략은 현대예술을 극사실화 혹은 디자인화로 몰아갔다. 또한 실제로 예술가에 대한 아우라(Aura), 곧 모더니즘 예술에서 예술가가 가지고 있는 듯이 보였던 어떤 문제의 해답이 결국 형식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그 동안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우연성과 대중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키치(Kitsch) 문화가 아방가르드 예술의 모습과 꼭 닮은 모습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대중의 예술 참여는 컴퓨터, 더 정확히는 인터넷(Internet)이 등장함으로써 더 극적인 형태를 띄게 된다. 다음의 에코의 말은 아마도 이러한 문화대중의 급속한 발달을 예견한 것처럼 보인다:

"진행중인 작품"(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열린" 작품)의 시학은 예술가와 청중간의 관계유형뿐만 아니라 미학적 수용의 매커니즘 그리고 현대 사회의 예술작품의 위치도 전혀 다르게 만들어준다. 예술사에서도 새로운 장을 열어줄 뿐만 아니라 사회학과 교육학에서도 새로운 페이지를 열어놓는다. 새로운 의사소통적 상황을 만들어냄으로써 새로운 실천적 문제를 제기한다. 간단히 말해 예술작품에 대한 사유와 실용화 간에 새로운 관계를 설정한다."(움베르토 에코, 조형준 옮김, 열린 예술 작품: 카오스모스의 시학, 새물결, 1995, P.71)

웹의 보편화는 열린 예술 작품에 대한 논의를 더욱 중요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또한 예술의 탈예술화 경향 및 자본 의존적인 경향 또한 더욱 강화시켜왔다. 한 예로 가장 대중적이며, '재미'를 추구하는 컴퓨터게임이 이제는 예술의 한 분야로서 대접받게 되었으며, 더불어 자본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대중의 참여도에 있어서는 여타 어떤 예술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다는 점에 있어서, 또한 최소한의 게임규칙이외에는 어떠한 제약도 가해지지 않기에 여타 어떤 예술과도 비교가 안 될 만큼 그 자유도가 높다는 점에서, 에코가 말한 열린 예술 작품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분야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게임은 여타 예술과의 상호관계가 가장 활발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온라인게임의 대표장르이기도 했던 RPG(Roll-Playing Game)의 경우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의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이 그 모태가 되었다는 것만 봐도 게임이 문학과 가지는 상호관련성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열린 공간들에 대한 현재의 중간 평가는 다소 이중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 대중은 결국 대중 매체를 넘어서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으며, 오히려 다양성의 합일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답글에선 공격적인 편가르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며, 이는 때때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파시즘(fascism)의 위험성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카페나 소셜미디어와 같은 새로운 유대의 공간은 비슷한 생각이나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더욱 손쉽게 모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또한 웹사이트라든지 마이스페이스, 페이스북 등은 기존의 갤러리나 미디어의 선별된 개인을 넘어, 예술의 공급자-수요자 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도 했다.

"열린 예술 작품: 카오스모스의 시학(Opera aperta)"를 통해 에코는 대중매체와 정치권력에 맞서 열린 마음으로 삶의 복잡함과 애매모호함 그리고 미묘한 뉘앙스를 관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문화를 건설하고자 한다. 그는 열린 예술 작품이란 현대 예술을 설명하기 위해 세운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으며, 어쩌면 이 땅에 '열린 예술 작품'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도 도주선은 있다. 들뢰즈의 우려처럼 그것이 비록 꼭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는 모르지만, 분명 획일적인 판단기준을 제시하려는 어떠한 시도들만큼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