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특별한 사람들의 이름만을 기록하지만, 세상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사람들에 의해 완성된다. 자신이 슈퍼맨이라고 생각하던 소년, 갑갑한 궁전을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찾아가는 공주가 되기를 바랬던 소녀, 혹은 TV 속에서 화려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동경하던 어린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자기만의 특별한 사람들과 세상을 만들어나간다. 그들이 누군지 알아주는 사람들은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을런지는 모른다. 하지만 눈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겐 각자만의 꿈이 있고, 비밀이 있고, 세계가 있다.

노인은 한참 젊을 때 죽고, 할아버지는 변장한 어린아이일 뿐이기 때문이다. ("소외", '시인이여, 살롬!',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열린책들, p. 121)

자신만의 꿈을 지키려던 사람들, 하지만 현실 앞에서 조금씩 체념해야만 하는 사람들. 고국 칠레에서 정치범으로 쫓겨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전세계를 떠돌아다녔던 루이스 세풀베다(Luis Sepulveda)는 기나긴 망명길에서 만났던 그들만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굳건히 자리를 지키려했던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상실의 순간. "외면"은 세풀베다 특유의 사실성에 약간의 환상과 비애감을 결합시킨 단편소설들로 구성되어 있다.




치기어린 청년이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환상, 그리고 꿈많은 어린 소년이 잃어버린 모험. 마치 스스로의 젊은 시절을 회고하듯 세풀베다는 '행복에 떨며 진땀을 흘("외면", '기차에서 잃어버린 뭔가에 대하여',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열린책들, p. 66)'리는 젊은이들을 첫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한껏 부풀었던 열망이 산산히 사라지는 한순간, 청년은 실망을 할 겨를도 없이 스스로가 가졌던 감정을 외면해야만 한다.

때로 골목길을, 우리의 골목길을 지나갈 때면 정육점의 계단이 방금 죽은 사람처럼 내 가슴에 아프게 닿아왔다. 하지만 나는 빨리 잊었다. 아주 빨리 잊었다. 환멸을 느낀 말들은 샛길을 보지 않는 법이다. (같은 책, '산티아고에서 사라진 집', p. 48)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맛본 사람에게 사랑도 삶도 예전과 같은 설레임을 가질 수가 없다. 애인과 나누는 진한 입맞춤에선 '실패의 맛(같은 책, '커피', p. 232')'을 느끼면서도 마음껏 화도 못낸 채 그저 자신의 무력함을 받아들일 뿐이다. '돈 몇 푼에 영혼까지 빌려 주는 수천명의 사람들 중 한 사람(같은 책, '자동응답기', p. 104)'이 되어버린 청년은 변방으로 소리 없이 밀려나간다.

나는 그들이 내 영업 허가증을 돌려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내가 아무리 자비로운 성모 마리에게 애원하며 매달려도 말입니다. 나는 한 번도 나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그들에게 아무리 애원해도 말입니다. (같은 책, '공원에서 사탕과자를 파는 남자', p. 135)


출처 : 위키피디아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탈출구. 말 그대로 삶의 무게에 찌들어버린 눈동자는 마치 주문을 외우듯 '바다가 보고 싶어(같은 책, '바다를 보는 방법들', p. 271)'라는 말만을 계속해서 되내인다. 친한 친구들조차도 '어쩌면 더위를 먹어서 머리가 어떻게 된(같은 책, '전장에서의 밀회', p. 263)' 것처럼 보이는 청년을 더 이상 참아줄 수가 없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바다를 향해 떠나는 여정. 그는 여행을 통해 누구도 볼 수 없었던 자신만의 바다를 깨닫게 된다.

결과가 좋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차를 단 1센티미터라도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것은 승리를 의미합니다. 증오 어린 가래침 위로 얻은 기쁨의 승리입니다. (같은 책, '툴라의 기록', p. 187)

네루다(Pablo Neruda)를 접하고 꿈에 부풀었던 13살의 소년, 피노체트(Augusto Pinochet)의 쿠데타로 자신의 이상이 물거품처럼 사라져가는 광경을 코앞에서 바라봐야만 했던 24살의 청년. 모질었던 세월을 뒤로, 세풀베다는 도저히 끝날 줄 모르는 여정을 이어나가며 만난 모든 사람에게 조언을 건낸다. 비록 비극으로 끝날지라도 싸움을 포기하거나 체념하지 말라고, 결코 당신을 잊지않고 기억하겠노라고. '중요한 것은 이기는 게 아니라 싸우는 것(같은 책, '챔피언', p. 221)'이라고.

그랬다. 짐승이 원하는 것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인간이 베푸는 선물이나 적선에 의한 죽음이 아닌, 인간과의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싸움을 벌인 뒤에 스스로 선택하는 그런 죽음이었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열린책들, p. 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