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계의 고전. 90년대 세기말의 역사. 과장된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희대의 역작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이 제작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기대보다는 걱정이 먼저 앞섰던 기억이 난다. 그간의 경험으로 속편이나 리메이크작은 대개 실망으로 이어지는 게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만족스럽다고 말하기엔 좀 더 지켜봐야하겠지만, 적어도 "에반게리온 : 파(Evangelion : 2.0 You Can (Not) Advance, 2009)"가 원작과는 차별화되는 작품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이미 TV판 1편에서 6편까지의 압축판인 "에반게리온 : 서(Evangelion : 1.0 You Are (not) Alone, 2007)"에서 센트럴도그마가 일찌감치 등장할 때부터 "파"의 변화는 다소나마 예견되었었다. 신지와 미사토를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관계가 얽혀나가던 원작과는 달리, "파"에서는 어른들의 세계와 주변부 캐릭터들의 역할을 과감하게 생략하며 에바탑승자들에 집중해나간다. 특히 애정결핍에, 원작의 후반부를 매우 우울한 분위기로 만들었던 아스카는 이름마저 바뀌며 충격을 안겨준다. "The End of Evangelion : Air, 1997"에서 광기에 빠져들던 아스카의 모습은 신캐릭터 마리가 분담하는 느낌이라, '타나토스thanatos'의 엔딩테마가 흘러나오던 원작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팬들이라면 약간은 서운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항상 조용하고 거의 수동적으로 움직이던 레이가 보다 강하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며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캐릭터로 변화된 것 또한 이색적이다.

"파"의 변화는 캐릭터 뿐만 아니라 시점에서도 드러난다. 미사토가 스스로 자조하던 이야기들은 카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아스카의 정신세계 속에서 추상적으로 이루어지던 이야기는 아스카의 입을 통해 직접 말해진다. 숫자가 줄어들며 원작에서의 특성들이 뒤섞여버린 사도들과의 전투씬이 드물어진 대신, 안노 히데아키는 네르프 바깥의 일상을 부각하며 이야기의 중심축을 안에서 바깥으로 옮겨놓았다. 빠른 템포로 달려가며 TV판 19편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끝을 맺었다지만, <파>의 시점변화를 볼 때 아마 뒤이을 "Q"에서부터는 굳이 신극장판을 따로 만들어야했던 이유들이 하나 둘씩 베일을 벗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보다 밝고 명확해진 이야기. 원작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몇몇의 악취미적인 시도나, 약간은 닭살돋는 유치한 대사들, 테크놀로지를 위한 장면들도 더러는 눈에 띄여 불안하기도 하지만, 현재까지 절반이 공개된 신극장판이 이전의 "에반게리온"과는 선을 긋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단순한 리메이크를 넘은 "새로운 에바의 세계". 마지못해 현실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관객들의 기대를 배신하던 안노 히데아키의 세계관이 과연 어떻게 변화되었을지는 두고 봐야할 일이다. 하지만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건내는 용기만큼은 아직 순항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