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31일 세상을 떠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를 수식할 수 있는 말은 너무나도 많다. 20세기의 위대한 지성, 독보적인 구조주의 인류학자, 민족학의 대가 등등.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불구자에 불과하다며 비난했던 사람 또한 적지 않았다. 그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열대의 죽음을 그저 지켜보며 서구문명에 대해 냉정한 거리를 두는 그에게 자기우월감에 젖은 '우리'라는 단어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출처 : 위키피디아

사회가 있는 한 질서는 없을 수 없다.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은 각 사회가 지닌 질서 간의 유사성을 탐구하는 작업이었다. 아직도 국내에서야 좌파는 공산주의, 우파는 모호한 정체성과 거의 동의어로 쓰인다지만, 기실 좌파와 우파는 질서에 대한 입장차에 불과하다. 현재의 질서에 만족하느냐 아니면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느냐 정도랄까. 자유주의도, 자본주의도, 민족주의도, 낭만주의니 사실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것 따위도 처음 등장했을 때에는 모두 좌파의 영역이었다. 레비-스트로스에게 문제는 어떤 질서인지가 아니라 어떠한 한 질서가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믿는 것이었다.

"신화와 의미(Myth and Meaning), 1978"에서 그는 찬사와 비난이 공존했던 자신의 인류학에 대해 상당히 명확하게 설명해준다. 그는 "우주는 카오스가 아니 ("신화와 의미", '제1장 신화와 과학의 만남', 임옥희 옮김, 이끌리오, p. 34)"라며 "어느 정도까지는 다른 문화에 견주어 그들의 문화가 우월하다는 확신도 가지고 있어야 (같은 책, '제2장 '원시적인' 사고와 '문명화된' 사고', p. 47)" 한다며 제한을 걸지만, "과잉 커뮤니케이션(over-communication)"으로 문화의 독창성이 상실되어가는 데에서 우려를 표시한다. 이러한 우려는 "슬픈 열대(Tristes Tropiques), 1955"에서 지속적으로 여행에 대한 냉소로 등장하게 된다. 20세기 최고의 여행기라 일컬어지는 "슬픈 열대"의 첫 문장이 "나는 여행이란 것을 싫어하며, 또 탐험가들도 싫어한다. ("슬픈 열대", '제1부 여행의 마감 - 1. 출발', 박옥줄 옮김, 한길사, p. 105)"로 시작된다는 점은 역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시멘트에 묻힌 폴리네시아 섬들은 남쪽 바다 깊이 닻을 내린 항공모함으로 그 모습을 바꾸고, 아시아 전체가 병든 지대의 모습을 띠게 되고, 판잣집 거리가 아프리카를 침식해 들어가고, 아메리카·멜라네시아의 천진난만한 숲들은 그 처녀성을 짓밟히기도 전에, 공중에 나는 상업용·군사용 비행기로 인해 하늘로부터 오염당하고 있는 오늘날, 여행을 통한 도피라는 것도 우리 존재의 역사상 가장 불행한 모습과 우리를 대면하게 만들기밖에 더하겠는가? … 여행이여, 이제 그대가 우리에게 맨 먼저보여주는 것은 바로 인류의 면전에 내던져진 우리 자신의 오물이다. (같은 책, '제1부 여행의 마감 - 4. 힘의 탐구', p. 139-140)


"슬픈 열대"는 크게 보면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저서가 나오기 전까지 10여년에 이르는 경험과 사고를 담은 전반의 4개부와 1935년에서 1938년까지 브라질을 방문했을 때의 기록을 압축적으로 담은 후반의 5개부로 나뉜다. 전반부는 상당히 풍부한 이야기와 사고를 담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인도는 그에게도 꽤나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여행기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미개발지대에서 겪은 불편함과 가난한 그들에 대한 동정이 담긴 문명사회의 시선은 "슬픈 열대"에서도 등장한다. 하지만 '오만한 태도로 자기들을 짓밟아주기를 애원하는 (같은 책, '제4부 대지와 인간 - 15. 군중', p. 288)" 남아시아의 걸인들을 체험한 레비-스트로스는 이들의 게으름이나 비합리성, 혹은 비도덕적인 개인의 성향을 탓하기에 앞서, "상상을 초월하는 (같은 책, '제4부 대지와 인간 - 16. 장터', p. 301)" "진흙탕 속에 진을 친 많은 사람들로 우글대는 (같은 곳, p. 304)" 광경을 학자다운 감성으로 이야기한다.

하나의 사회는 인구가 지나치게 많아지면, 그 사상가들이 아무리 천재라 할지라도 예속(隸屬)을 분비해가면서가 아니면 존속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지리적·사회적·지적 공간 안에서 답답해졌을 때는 한 가지 간단한 해결책이 그를 유혹할 우려가 있다. 그 해결책이란 인간이라는 종(種)의 일부에 대해서 인간의 자격을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것이다. (같은 곳, p. 310-311)

문화의 다양성을 긍정하고, 각 문화가 지닌 특수성을 설명하기 위해 레비-스트로스는 저술 전반에서 치열한 사투를 벌인다. 서구문명의 공격성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긍정하는 엘리아스(Norbert Elias)와는 달리, 레비-스트로스에게 서구문명이란 그저 하나의 문화로 인정받는 수준에 머무른다. 마치 에너지보존의 법칙처럼 그는 문화가 지닌 가능성 혹은 역량에는 우위를 찾을 수 없다고 본다.

문자가 없는 사람들은 주변 환경과 천연 자원에 대한 엄청나게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 인류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정신적인 능력을 한꺼번에 발전시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얼마 되지 않는 영역만을 사용할 수 있을 따름이며, 이 작은 영역은 문화마다 서로 다릅니다. 그뿐입니다. ("신화와 의미", '제2장 '원시적인' 사고와 '문명화된' 사고', 임옥희 옮김, 이끌리오, p. 45-46)


레비-스트로스는 새로움에 열광하고 호기심을 많은 서구문명을 '과열된 혹은 동적 사회(hot or mobile society')라고 부르며 객관화한다. 새로운 기술, 새로운 제품, 새로운 장소가 더욱 열정적인 반응을 얻는 새로운 서구문명의 도시를 돌아본 그는 "아메리카의 도시들은 단지 새롭게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새로움을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최근에 만들어진 것일수록 더욱 훌륭한 것이("슬픈 열대", '제3부 신세계 - 11. 상파울루', 박옥줄 옮김, 한길사, p. 227)"라며 소감을 말한다. 새로움에 열광하는 서구문명 자체를 비난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던 듯 하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현대서구문명의 시끄러움과 호기심을 저주하며 인도의 신화 속으로 도망쳤다면, "싫든 좋든 간에 그녀들의 사진을 찍고 돈을 지불해야만 했 (같은 책, '제5부 카두베오족 - 19. 날리케', p.352)"던 레비-스트로스는 지극히 차분한 어조로 서구문명이 침투해가는 열대사회의 마지막 순간을 기록할 뿐이다.

우리는 죄인들에게 형벌을 내림으로써 그를 어린애로 취급하며, 모든 사후적인 위로를 거절하는 점에서 그를 성인으로서 취급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동료 인간들을 잡아먹는 대신에 그들을 신체적·도덕적으로 절단시킨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의 '위대한 정신적 진전'을 이루었다고 믿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짓이 아닐 수 없다. (같은 책, '제9부 귀로 - 38. 럼주 한잔', p. 697-698)

블로그에서 그를 기억하는 글을 쓴다는 것도 참 우스꽝스럽게 느껴져 명운을 달리한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과잉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는 대표적인 장소 중에 하나이며, 그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여행사진첩이 넘쳐나는 공간이니 말이다. 인류의 묘비를 찾아다니던 그의 묘비를 기념하고 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까. 휴머니즘이 지닌 편협함과 그로 인한 역설적인 파괴의 현장을 증언하던 레비-스트로스에게 인간은 그저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한 사회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와의 관계를 다루는 관점은 결국 한마디로 말하자면 종교적 사고법을 통해서 살아 있는 자들 상호간에 실존하는 관계를 숨기거나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려는 노력을 반영하고 있다는 진리는 은폐할 수가 없다. (같은 책, '제6부 보로로족 - 23. 죽은 자와 산 자', p. 452-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