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반, 유럽에서 이성의 잔치는 끝나가고 있었다. 사회주의 혁명의 이상은 민족주의와 함께 꼬꾸라지며 지루한 권태로움에 젖어들었다. 신이 더 이상 인간을 구원할 수 없었던 건 이미 옛 일이었고, 각종 주의(-ism)들은 공허한 토론으로 사람들을 갈라놓았다. 진취적이고 이성적인 르네상스적 인간은 현실의 곤궁 앞에서 무기력하기만 했다.


James Joyce in Paris, 1924, Portrait by Patrick Tuohy
출처 : 위키피디아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가 태어났던 1882년의 아일랜드는 여전히 보수적인 카톨릭 교회가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영국의 한 부분으로 영국국교회를 강요당했던 아일랜드인에게 종교는 스스로를 규정하는 중요한 척도였다. 1845~9년 100만명에 이르는 아일랜드인이 아사한 대기근은 영국에 대한 반발감을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격화시켰고, 1848년의 봉기를 시작으로 카톨릭 교회 안에는 민족주의가 뿌리내려갔다.

독립의 역사는 어디서나 그렇듯 순탄치 않았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 한국의 친일파처럼 매국행위를 일삼은 친영파들도 있었으며, 각자 다른 이상으로 인해 배신 또한 끊임없이 이어졌다. 조이스는 1891년 아일랜드 독립사의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파넬(Charles Stewart Parnell)이 교회와 정치권의 비난 앞에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독립운동에 회의감을 품게 된다.

역시 파넬의 죽음에 실망한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가 대기근 당시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여성의 모습을 그린 <캐들린 백작 부인(The Countess Cathleen, 1892)>을 발표해 카톨릭 교회의 거센 비난에 휩쌓이고, 그를 옹호하던 조이스는 아일랜드 사회의 편협함에서 절망을 보게 된다.

The Dead(film), 1987, directed by John Huston
출처 : 위키피디아

희망은 절망 속에서 피어난다?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더블린 사람들(Dubliners, 1914)"을 펼쳐드는 순간 머리가 멍해진다. 유년기부터 노년기까지 차근차근 펼쳐지는 더블린 사람들의 일상은 부조리의 연속이다. '애러비(Araby)'의 소년은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장터에서 어슬렁거리다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대한 일종의 깨달음(Epiphany)을 얻고, '이블린(Eveline)'의 소녀는 이 부조리로부터 '도망! 도망해야만 한다!(1)'는 절박함에 사로잡힌다.

캄캄한 어둠 속을 바라보면서 나는 자신이 허영에 눈이 어두워 거기에 농락되고 있는 서글픈 인간임을 알았다. 그러자 나의 눈은 고뇌와 분노로 타올랐다.(2)

소녀의 연인은 그녀를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유일한 희망이다. 그의 손을 꽉 잡기만 한다면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향해 새로운 인생을 찾아갈 수 있다. 소녀는 알고 있다. 하지만 소녀는 마지막 순간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앉고 만다. 연인을 떠나보내는 '그녀의 눈에는 사랑이니 결별이니 인사니 하는 따위의 표정을 찾아볼 수 없었(3)'고 마음 속엔 절망이 만성화되어간다.

젊은 시절에는 물론 방탕도 했다. 가슴에 품었던 자유 사상을 자랑하며 술집에서는 친구들에게 신의 존재를 부정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지난날의 꿈에 지나지 않으며, 거의 끝난 거나 마찬가지다.(4)

떠나지 못하고 청년이 된 탕아는 고작 순진한 여자들을 등쳐먹으며 생활을 잇는다. '손바닥에서 반짝이는 조그마한 금화 하나(5)'로 기뻐하는 청년의 눈빛에서 예전의 감정은 찾아볼 수가 없다.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은 청년은 어느덧 부조리의 한 부분이 되어버렸다.

"때리지 마, 아빠! 내 꼭 … 내, 마리아에게 아빠 위해 기도할게. 때리지 마… 안 때리면 아빠, 아빠 위해 기도할게, 아빠…."(6)

하지만 일상의 관성이 깊어갈수록 순수했던 지난 날이 그리워지기 마련이다. '그는 누가 뭐라 해도 옛날이 가장 좋았다(7)'며 지난 날을 회상한다. '사회 혁명 같은 것은 몇 세기를 지난다 하더라도 더블린에서는 일어날 성싶지 않다(8)'며 냉소짓는 노인의 표정에 알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젊은 시절의 회한이 스쳐지나간다.

우리 가운데는 새로운 세대가 자라나고 있습니다. 이 세대야말로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이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생각'에 몰두하고 있지요. 그 열광, 그 뜻하는 것은 그릇되지만 대체로 말해 진지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회의의 시대이며 다른 곳에서 사용한 말을 써도 좋다면, 생각에 여념이 없는 세대입니다. 이 새로운 세대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지만 과거의 우리 것이었던 온정, 손님에 대한 후대, 또는 온화한 유머 같은 것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9)

더블린을 떠난 조이스는 1905년 "더블린 사람들"의 원고를 완성하지만, 아일랜드에 대한 자전적인 절망감으로 가득한 책을 출판해주는 이는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이후 10여년에 걸쳐 이 책을 출판하기 위해 오랜 씨름을 이어갔으나 끝내 거절당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적국인 영국 런던에서 1914년 출판되며 가치를 인정받았다.

22살에 더블린이라는 울타리에서 빠져나온 이후, 평생 세계를 떠돌아다니다 제2차세계대전 중 병환으로 사망한 그에게 희망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율리시즈(Ulysses, 1922)"라는 희대의 소설은 어쩌면 그에게 조그마한 관용조차 보이지 않은 채 담을 쌓았던 조국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을까? 혹은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새로운 생각'들에 대한 염증이었을지도 모른다.

'관용의 눈물이 가브리엘의 눈에 가득 어리었다. (10)

※ 본문의 번역은 "젊은 예술가의 초상, 더블린 사람들, 제임스 조이스 지음, 신현규 옮김, 중앙미디어, 1995" 와 "더블린 사람들, 제임스 조이스 지음, 김병철 옮김, 문예출판사, 1999"를 참고.

(1) Escape! She must escape!, '이블린(Evelyne)' 중에서

(2) Gazing up into the darkness I saw myself as a creature driven and derided by vanity; and my eyes burned with anguish and anger., '애러비(Araby)' 중에서

(3) Her eyes gave him no sign of love or farewell or recognition., '이블린' 중에서

(4)
All his long years of service gone for nothing! All his industry and diligence thrown away! As a young man he had sown his wild oats, of course; he had boasted of his free-thinking and denied the existence of God to his companions in public- houses. But that was all passed and done with... nearly., '하숙집(The Boarding House)' 중에서

(5) A small gold coin shone in the palm., '두 사람의 탕아(Two Gallants)' 중에서

(6)
"O, pa!" he cried. "Don't beat me, pa! And I'll... I'll say a Hail Mary for you.... I'll say a Hail Mary for you, pa, if you don't beat me.... I'll say a Hail Mary....", '대응(Counterparts)' 중에서

(7)
He said that there was no time like the long ago and no music for him like poor old Balfe, whatever other people might say;, '진흙(Clay)' 중에서

(8)
No social revolution, he told her, would be likely to strike Dublin for some centuries., '가슴아픈 사건(A Painful Case)' 중에서

(9)
A new generation is growing up in our midst, a generation actuated by new ideas and new principles. It is serious and enthusiastic for these new ideas and its enthusiasm, even when it is misdirected, is, I believe, in the main sincere. But we are living in a sceptical and, if I may use the phrase, a thought-tormented age: and sometimes I fear that this new generation, educated or hypereducated as it is, will lack those qualities of humanity, of hospitality, of kindly humour which belonged to an older day., '죽은 사람들(The Dead)' 중에서

(10)
Generous tears filled Gabriel's eyes.,'죽은 사람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