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스밴드라는 소재의 비슷한 듯 참 다른 영화들. "스윙 걸즈(Swing Girls, 2004)"에선 정말 '대책없이 발랄한' 소녀들이 자신도 모르게 점점 음악에 빠져들어가고, "브래스트 오프(Brassed Off, 1996)"는 무뚝뚝한 탄광촌의 광부들이 이제는 떠나야하는 밴드에 대한 마음을 박력있게 내지른다.


출처: 위키피디아


웃다가 울게 만드는 금관의 화음 : 여고생과 광부

"스윙 걸즈"의 주인공들은 재즈라고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녀들이다. 무더운 여름방학, 보충수업을 빼먹기 위한 낙제생들의 잔머리가 빛을 발한다. 식중독으로 전원이 들어누운 관악부를 대신해 여고생들은 지긋지긋한 보충수업 대신 생전 처음 보는 악기를 선택한다.
반면 "브래스트 오프"의 주인공들은 비록 본업은 탄광촌의 광부이지만, 1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밴드의 당당한 단원들이다. 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않다. 탄광은 곧 문을 닫을 위기에 있고, 광부들은 당장의 생계를 고민해야 하는 처지이다. 단원들은 밴드를 그만두기 위해 심란한 마음으로 연습장으로 향한다.



<스윙 걸즈>의 트레일러 영상



음악영화!와 음악영화? : 야구치 시노부(Sinobu Yaguchi)와 마크 허먼(Mark Herman)

야구치 시노부 감독은 특유의 가볍고 일상적인 터치로 스윙이라는 낯선 음악을 소개한다. 낙제생들의 선동자 토모코(우에노 주리)가 재즈라는 단어를 듣고 처음 하는 말이 재미있다.

"재즈란 건 아저씨들이 하는 거잖아. 인텔리해 보이는 사람들이 블랜디잔 같은 거 이렇게 돌리면서."

아마 재즈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을 법한 이미지일 것 같다. 뭔가 어두침침하고 담배연기 자욱한 중년남자들로 가득한 공간에 드레스를 입은 여성보컬이 허스키한 보이스로 노래를 부르는. 하지만 재즈는 "스윙 걸즈"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음악이다. 뮤지션들은 그냥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관객들은 더러는 듣고 더러는 서로 잡담을 나눈다. 재즈의 어두침침한 이미지는 일방통행이 없는 자유로움이 만들어낸 하나의 풍경일 따름이다.
마크 허먼 감독의 언어는 야구치 시노부 감독에 비하면 상당히 묵직한 편이다. 폐광에 온 신경이 가있는 단원들의 산만한 연주에 지휘자 대니(피트 포스틀스웨이트)는 버럭 역정을 낸다.

"탄광 문제는 나도 알지만 이건 별개야, 음악이라고. 중요한 건 음악이야!"

하지만 삶은 음악만으로 지탱하기가 어렵다. 음악 자체의 비중만 따지면 두 영화에 큰 차이가 없지만, "스윙 걸즈"가 영화상에서 소품으로도 등장하는 입문서처럼 음악에 충실하다면 "브래스트 오프"는 음악보다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시대의 풍경을 보여주기 위해 더욱 노력한다. 1984년부터 10여년을 이어간 마가렛 대처 행정부와 영국탄광촌 간의 오랜 줄다리기. "브래스트 오프"의 밴드는 탄광촌 해체라는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친다.




쉽게 포기할 수야 없지! : 타쿠오(히라오카 유타; Yuta Hiraoka)와 글로리아(타라 피츠제랄드; Tara Fitzgerald)

멋진 피아노 실력에도 불구하고 굳이 관악부에서 심벌즈를 연주하며 실수만 연발하던 타쿠오. 탈퇴서를 쓰고도 제출하지 못하던 소심한 남학생은 무책임한 소녀들을 만나며 달라져간다. 어렵사리 마련한 중고색소폰을 애지중지 불어보던 토모코가, 관악부에서 뛰쳐나와 강변에서 홀로 전자피아노를 연주하던 타쿠오와 함께 강을 사이로 두고 연주하는 장면은 "스윙 걸즈"의 최고의 명장면이 아닐까싶다. 서로 있던 자리도, 살아가던 모습도 달랐지만 재즈라는 강 위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동질감을 느낀다.

우락부락한 남자들만 가득한 밴드에 갑자기 들어온 낯선 아리따운 처녀, 글로리아. 그저 연주를 하고 싶어 찾아왔다며 글로리아는 자신의 소박한(?) 플루겔혼(flugelhorn)을 꺼내보인다. 생계걱정으로 머리 속이 복잡하던 아저씨들은 그녀의 외모보다 더욱 더 아름다운 연주에 넋을 잃고, "브래스트 오프"는 처음으로 멋진 협연을 선보인다. "Rodrigo's Concierto de Aranjuez"에서 울려퍼지는 플루겔혼의 연주는 꼭 한 번 들어보시길 권해드리고 싶다.






불협화음이면 어때? 어쨌든 한다 : 토모코(우에노 주리; Juri Ueno)와 앤디(이완 맥그리거; Ewan McGregor)

역시 이 두 영화에서 멋진 선남선녀들을 빼놓을 수가 없다. 여전히 우에노 주리는 제대로 망가지며 귀여운 악당의 매력을 마음껏 발산한다. 그렇게 컴퓨터가 갖고 싶다고 졸랐으면서도 막상 손에 들어오자마자 흥미를 잃어버리는 소녀 토모코. 영화상 그녀의 어머니가 날리는 대사 한 마디가 그녀의 캐릭터를 충분히 표현해준다.

"넌 정말 포기가 빠르구나"

그런 토모코도 마침내 애정을 갖고 재즈에 빠져든다. 싫다 싫다하면서 어쩔 수 없다며 어깨를 으쓱하며 악기를 잡던 소녀들은, 막상 밴드부가 돌아와 더 이상 악기를 잡을 수 없게 되자 길을 나서며 서럽게 울어댄다. 길 가던 할머니는 선생님이 돌아가셨냐고 묻는다. 쓰지 않던 컴퓨터와 동생의 게임기까지 팔아버리고 친구들과 함께 알바를 뛰며 악기를 마련하려는 토모코. 영 모양새가 안나는 중고악기에도 너무 기뻐하는 순수함에 행복해진다.

"스윙 걸즈"가 귀여운 소녀들이라면, 역시 "브래스트 오프"는 무뚝뚝한 중년들의 매력이다. 이 영화를 찍을 당시만 해도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20대의 이완 맥그리거는, 이미 이 때부터 무언가 중년의 향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매일마다 지각에, 실수투성이의 연주로 구박받는 청년 앤디. 밴드단원들이 다 모였는지 묻는 버스기사의 질문에 지휘자 대니가 대답한다.

"항상 늦는 놈이 하나 있어"

수시로 당구장에 드나들며 친구와 내기당구에 빠져있다지만 그래도 밴드회비만큼은 꼭 남겨두는 청년. 누구보다도 광산촌 마을에 애정이 깊고 떠나기 싫어하지만, 그는 좀처럼 마음과는 다른 모습만 반복한다. 솔직하고 직설적인 글로리아와 솔직하지 못하고 베베꼬인 앤디의 언갈리는 애정행각도 "브레스트 오프"의 조그만 재미이다. "브레스트 오프"에서 사랑이야기는 단지 사라져가는 탄광촌 풍경의 하나로 머무른다는 점이 더욱 마음에 든다.




딴지쟁이들, 우리는 분위기를 깬다! : 카오리(모토카리야 유이카; Yuika Motokariya)와 짐(필립 잭슨; Philip Jackson)

주연만큼 빛나는 조연들, 아마 이 두 사람이 없었다면 영화가 좀 심심해지지 않았을까? 임시밴드부원 모집에 리코더를 들고 온 소녀 카오리. 시도때도 없이 베시시 웃는 그녀에겐 소녀악당들을 꼼짝못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폐활량을 늘리기 위한 혹독한 훈련에 불만 가득한 소녀들이 이게 악기랑 무슨 상관이냐고 떼를 쓰려는 찰라, 처음으로 악기를 불어보이는 카오리의 모습에 소녀들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이처럼 간간히 터지는 그녀의 생뚱맞음은 이야기를 보다 부드럽고 즐겁게 만들어준다.

"브레스트 오프"의 짐은 또 카오리와는 반대로 갈등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어떻게하면 밴드를 그만둘 수 있을까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던 첫모습부터 심상치 않다. 글로리아의 등장과 함께 갑자기 호색중년이 되더니, 그녀가 탄광을 닫으려는 회사의 간부라는 사실을 알고는 급격히 냉랭한 모습을 보이며 앤디와 글로리아의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어버린다. 감정을 좀처럼 잘 숨기지 못하는 투박한 짐. 그는 서로 도우며 돈독하게 살아왔던 탄광촌 마을이 분열되고 상처받아가는 단면을 드러낸다.




오직 애정, 그 하나로 : 수학선생님(다케나타 나오토; Naoto Takenata)과 대니(피트 포스틀스웨이트; Pete Postlethwaite)

우왕좌왕하는 밴드를 잡아주고 이끌어가는 중견배우들. "스윙 걸즈"에서 다케나타 나오토는 재즈에 필 충만하지만 좀처럼 그 필을 발산하지는 못하는 수학선생님으로 친숙한 얼굴을 드러낸다. 풍부한 지식과 어마어마하게 앨범을 지닌 선생님에게 소녀들은 갑자기 선망의 눈길을 보내고, 또 제자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나름의 노력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 지도자의 애달픔이 양념처럼 더해진다.

약간은 카메오같은 느낌이 드는 타케나타 나오토에 비해 피트 포스틀스웨이트가 맡은 대니는 "브래스트 오프"의 중심인물 중 하나이다. 광산촌 마을과 점점 건강이 나빠져가는 대니는 겹쳐지며 쇠락의 은유가 된다. 아픔을 숨긴채 정말 오직 음악에 대한 애정 하나로 단원들을 묶고 끝까지 멋지게 피날레로 달려가는 지휘자. 단원이자 자신의 아들인 필(스티븐 톰킨슨; Stephen Tompkinson)과 나누는 미묘한 동지애. 진폐증으로 쓰러진 그를 위해 밴드단원들은 "Danny boy"를 연주하고, 병석에 누워 혼수상태에 있던 대니는 단원들의 마음에 보답하듯 깨어나 무뚝뚝한 표정으로 간호사에게 자신의 감동을 말한다.

"죽음의 문턱에 가 있는데 저놈들이 와서 저러고 있잖소"
"시끄러우시죠? 금방 못하게 할게요"
"못하게 한다고? 그러면 곧바로 시체실로 가게 될 거야"
"전기삽으로 삽질하는 것 같은가?"
"맥박 상태를 묻는 거라면 맞아요. 아주 빨라요"
"이 곡을 연주할 때면 항상 그랬어"






세월이 지날수록 더해가는 감동

이제는 촌스러울만도 한 세월이 흘렀건만, 두 영화는 시간이 지나도 오히려 감동을 더한다. 야구치 시노부 감독의 소탈한 언어는 "스윙 걸즈"를 다시 봐도 참 즐거운 영화로 만들어놓았다. 뛰어날 필요는 없다. 선뜻 무언가에 애정을 갖기 어려운 시대이기에, 순수하게 재즈에 빠져드는 여고생들의 모습은 아무리 어설프고 실수투성이라도 충분히 즐겁고 행복하다.

이번으로 3번째로 다시 찾은 "브래스트 오프"는 개인적으로 죽기 전에 꼭 봐야할 영화 3편만을 꼽는다면 그 중의 하나로 꼽고 싶다. 의상이나 헤어스타일 등의 촌스러움은 마크 허만 감독의 사실적인 묘사와 맞물리며 그 당시 시대를 잘 드러내주는 짙은 향기처럼 느껴진다. 잃어가는 사람들의 모습. 생계로 인해 부업으로 광대를 하는 필이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공연을 하는 도중 꾹꾹 억눌러온 한 마디를 터트리는 장면을 소개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존 레넌도 데려가고, 에인즐리 탄광의 광부도 셋이나 데려가더니,
이젠 내 아버지마저 데려가려 하면서 왜 마거릿 대처는 살려두는 거야?
하느님이 있기나 한 거야?
너희들은 착하구나
내 이름은 '배신자'란다
잘 자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