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당췌 믿을 수 있는 것이 없다. 심리학에선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믿음 중의 절반이 거짓이거나 사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명쾌한 논리의 대명사,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은 1963년 게티어(Edmund L. Gettier)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당했고, 가장 현실에 가까운 학문, 물리학은 아이러니하게도 점점 추상적으로 되어가며 시간과 공간을 융합시킨다.



문학의 부조리는 아마도 불신의 산물일 듯 하다. 루이스 캐럴과 세르반테스, 프란츠 카프카, 알베르 카뮈, 사뮈엘 베케트 등 많은 작가들은 현실과 가상을 혼재시키며 그들의 불신을 드러낸다. 중세와 근대 사이에서 잔뜩 불만을 털어놓는 셰익스피어 또한 예외는 아니다. 이들은 합리주의를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실주의자들을 경멸한다. 그리고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 문화의 전통 위에 불신의 전통을 쌓아놓았다.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환상문학. 스페인의 아방가르드운동을 겪은 그는 아르헨티나에 새로운 문화적 운동을 주도해나갔다. 진실과 거짓을 판별하기 힘든 현대문명 속의 가우초(Gaucho; 목동). "셰익스피어의 기억"은 보다 간결해지고 자조적인 보르헤스 말년의 필치가 담긴 소설단편집 "모래의 책(El libro de arena, 1975)"과 "셰익스피어에 대한 기억(La memoria de Shakespeare, 1983)"으로 묶여있다.

"모래의 책"의 첫 단편 '타자'에서 보르헤스는 보르헤스를 만난다. 보르헤스는 1969년의 이야기를 1972년의 시점에서 1974년에 기록한다. 사실과 거짓을 뒤섞는 특유의 스타일이 풀어내는 자전적인 이야기. 시간은 혼재되고 그는 '그는 나를 꿈꾸었다. ("셰익스피어의 기억", '타자', 황병하 옮김, 민음사, p.21)'라고 말한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에 대한 기억"의 첫 단편 '1983년 8월 25일'에서 보르헤스는 다시 한 번 자신과 만난다. 10년이 지나 그는 자신의 죽음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게 꿈이란 말입니까?"
"단언하건대 나의 마지막 꿈이지" (같은 책, '1983년 8월 25일', p.148)

죽음과 가장 가까운 언어, 무한. 어떤 식으로도 설명되거나 상상되어질 수 없는 언어. 최초로 무한을 증명해낸 수학자 칸토어(Georg Cantor)는 'Je le vois, mais je ne le crois pas(나는 그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을 믿지 않는다)'라며 자신의 충격을 편지에 남겼다. 한정된 언어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기에 무한은 신과 동격으로 여겨지며 숭배받아왔다. 보르헤스는 인류가 무한 앞에서 느낀 일탈, 공포, 광기를 끊임없이 추적해 들어간다. '모래의 책'과 '거울과 가면'에서 무한을 깨달은 이는 진실을 숨겨두려고 하거나 자살을 하며, '원반'에서는 급기야 죽임을 당한다. 마침내 터번을 쓴 거지는 무한을 가져가며 말한다.

"당신은 낮과 밤, 분별력, 일상적 습관, 그리고 세상을 되찾게 될 거요." (같은 책, '파란 호랑이들', p.172)

보르헤스의 무한은 한 사람의 기억으로 수렴된다. '두 개의 똑같은 언덕이란 없다. 그러나 지구상의 어떤 곳을 가든 평원은 항상 똑같다. (같은 책, '지친 자의 유토피아', p.98)'라며 시작되는 '지친 자의 유토피아'에서 화자는 국가와 도시, 돈, 문명이 사라져버린 유토피아로 방랑을 떠난다. 필사적으로 흔적을 남기려하는 문명에 대한 허무한 조롱. '언어란 일종의 인용체계 (같은 곳, p.105)'에 불과해지고, 사실은 의심과 망각 앞에서 힘을 잃는다. 유토피아엔 명칭이 없다.

한 사람의 꿈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한 부분이다. ("칼잡이들의 이야기", '마르띤 피에로', 황병하 옮김, 민음사, p.46)

꿈과 환상의 작가, 보르헤스. 그의 언어에서는 고유명은 사라지고 일반명이 남을 뿐이다. 무한 속에서 고유성이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삶의 반복은 사실을 앗아간다. 그저 "내가 존재한다는 단지 그 사실이 나를 살아 있게 ("셰익스피어의 기억", '셰익스피어의 기억', 황병하 옮김, 민음사, p.193)" 할 뿐이다. 페론(Juan Peron)과 기나긴 악연을 겪은 보르헤스에게 누가 어디서 언제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유는 마술처럼 만들어지고, 권위는 고유명의 사실로 다가오기에.

"픽션들(Ficciones, 1944)"과 "알렙(El Aleph, 1949)"의 아찔한 현기증을 견딜 수 없었다면 "셰익스피어의 기억"은 매우 좋은 나침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