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잠들다.

유럽을 떠돌며 필사적으로 자신의 구원을 찾았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는 스웨덴에서 잉마르 베르히만(Ingmar Bergman)을 만난다. <희생(Offret; The Sacrifice, 1986)>은 아마 두 사람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나오지 않았을, 타르코프스키의 마지막 불꽃과도 같은 작품이다.

연이은 학살과 전세계가 너와 나로 갈라지며 서로 다투었던 시절, 타르코프스키에게 구원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그는 이탈리아로 도망치듯 날아갔고, 다시는 소련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폐암에 걸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유언과도 같은 작품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타르코프스키의 말년은 미시시피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숨을 거둔 미국의 소설가 리차드 라이트(Richard Wright)를 생각나게 한다.


출처 : 위키피디아


<희생>은 오프닝 크리딧부터 거장의 거친 숨결이 느껴진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방 박사의 찬미(Adoration of the Magi)'와 바흐의 마테수난곡(St. Matthew Passion) 39번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Erbarme dich mein Gott)'가 마치 끝나지 않고 이어질 것만 같은 장장 5분간에 걸친 롱테이크가 인상적이다. 첫 장면의 바닷가에서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묘목을 심는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죽은 나무에도 물을 주면 마침내는 꽃이 필 수도 있다는 한 마디를 남긴다. 두 개의 오프닝은 타르코프스키가 자신의 생명을 쥐어짜내 다음 세대에 남기는 사자후와도 같다.

영화의 전반은 현직에서 은퇴한 작가 겸 대학교수 알렉산더(얼랜드 조셉슨)의 고독에 집중한다. 도시에서 벗어나 외진 시골마을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는 그는 언뜻 모두가 꿈꿀만한 성공을 이룬 후 편안한 여생을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세속적인 아내 아들라이드(수잔 플리트우드)나 딸 마르타(필리파 프랑첸)와는 달리 알렉산더는 세상에 대한 이상을 지닌 사람이다. 그는 실어증에 걸린 아들(토미 키엘키비스트)에게 자신의 속내를 조금씩 풀어놓는다. 아무도 인정하지도, 곱게 보지도 않는 묵묵한 꾸준함. 그는 죽은 나무에서 꽃이 피기를 바란다.

생일을 맞은 알렉산더를 축하하기 위해 외딴 집으로 주치의 빅터(스벤 울터)와 우체부 오토(알란 에드발)가 찾아온다. 긴장감이 감도는 집 안의 어두운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하며, 라디오에서는 핵무기가 사용되는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알린다. 세상이 어제와 같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지금까지 누려온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간절한 기도를 하는 알렉산더. 마치 신의 사자처럼 다가온 우체부 오토는 만약 그가 가정부 마리아(Maria, 고드룬 기슬라도티르)와 함께 동침을 한다면 기도가 이루어지게 될 거라고 말한다.



출처 : 위키피디아


마치 거짓말과도 같은 희생. 감독 스스로가 죽음과 너무나도 가까이 있었던만큼 <희생>은 종교적인 환상이 여느 때보다도 강하게 나타나는 작품이다. 신의 메세지를 받아 그대로 시행하는 알렉산더의 모습은 그의 주변인들에겐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족 속에서 보이지 않게 드러나던 고독감은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러 맨살을 드러낸다. 어색하게 유지되던 관계는 파괴되고, 인간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려하는 얇팍한 소속감과 유대의 착각은 여지없이 무너져내린다.

타르코프스키는 영화사에 길이 남아있는 마지막 장면에서 성서의 첫 구절을 인용한다. 실어증에 걸린 소년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이예요, 아빠?(In the beginning was the word...why is that, papa?)'라며 처음으로 말을 한다. <The Miracle Worker>의 'water'라는 짧막한 단어가 던져주는 빛이 생각나는 장면이다. 1986년의 칸느는 거장이 뿌려놓는 한숨과 같은 씨앗에 존경어린 시선으로 심사위원대상(Grand Prix)을 비롯한 4개의 부분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희생>이 재미있는 영화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초단위로 돌아가는 요즘의 영화에 비한다면 그의 사색적인 롱테이크는 지루하게 느껴지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때때로 봤다는 것 그 자체로만으로도 이전의 자신과 이후의 자신이 달라보이는 작품이 있다. <Time>지가 말한 '헐리우드 영화를 보고나서 영화 <희생>을 보는 건 서커스를 빠져나와 중세의 예배당을 방문하는 것과도 같다(To see The Sacrifice after a junk-food diet of Hollywood movies is like ducking out of a carnival to visit a medieval crypt. 'Cinema: End-of-the- World Blues the Sacrifice' by Richard Corliss, 1986)'는 이 작품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한 마디이다. 분명 지루하지만 결코 시시하지는 않은 작품, 타르코프스키는 그의 꿈 속에서 여전히 살아숨쉬고 있다.

"나는 이 영화에서 기독교의 자기희생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에서 살아가며 발버둥치는 사람의 한 측면을 다루려고 했다.(In this film I deal with one of the aspects of this struggle for anyone living in society: the Christian concept of self-sacrifice.)" Andrei Tarkovsky, Positif,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