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으로 인해 갑갑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요즘이다. 작년부터 이어진 세계적인 불황의 구름은 아직 떠날 줄을 모르는 것 같다. 1930년대의 대공황을 겪은 서구사회는 다소 공포어린 모습으로 현재를 바라보고 있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본격적인 경제적 근대화가 뒤늦게 시작된 탓인지, 은행과 대기업에 대한 소시민의 분노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편이기도 하고, 현재의 상황에도 다소 낙관적인 견해가 우세해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에서는 16세기 말의 영국의 엔클로저 운동(Enclosure movement)부터 해서, 1900년대 전후로 한 노동자 운동을 걸쳐 대공황에 이르기까지, 소시민들은 오랜 세월동안 산업자본이 행사한 경제적인 폭력에 노출되어왔다. 지금도 은행이라는 말만 듣고도 이를 가는 사람이 적지 않을 정도로, 대공황기의 은행은 무수한 개인들의 희생 위에 살아남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는 산업자본의 횡포로 인해 자신의 땅에서 쫓겨난 소농민의 시선에서 대공황을 바라본 작품이다.

The Grapes of Wrath 초판본
출처: 위키피디아


조드(Joad) 일가는 오클라호마에서 평범하게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소농민 가족이다. 연이은 흉년과 한파로 인해 은행에 빚을 지게 된 조드 일가를 비롯한 주변 일대의 소농들은, 늘어만 가는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엔 땅을 차압당하고 거리로 내쫓기게 된다. 캘리포니아는 일자리가 넘쳐나는 낙원이라는 전단지를 보고, 많지도 않은 재산을 처분하여 중고차와 여행경비를 마련하는 가족들. 각종 생활가제도구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 임산부, 노인, 그리고 우연히 만난 목사 케이시(Casy)를 포함해 13명을 꾸역꾸역 태운 6인승 중고차는 무작정 도로로 나선다.

이들의 여행은 순탄치 않아, 출발하자마자 차마 평생을 살아온 고향을 떠날 수 없었던 할아버지의 죽음을 맞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생존이 걸린 도로 위에서 마음껏 슬픔을 가질 겨를도 없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기도 하고, 때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루하루 캘리포니아를 향한 차의 시동을 건다. 향기로운 포도를 입 안에 가득 머금겠다는 꿈을 품은 채.

강을 넘고, 산을 넘고, 가막을 가로지른 여행은 혹독하기 이를 데 없다. 게다가 캘리포니아로 다가갈수록 자신들이 품었던 낙원과는 점점 동떨어진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이미 사람들은 넘쳐나 일자리를 찾는 게 쉽지 않을 뿐더러, 설령 찾는다고 해도 굶주림조차 면하기 어려운 임금이 전부라는 것이다. 조드네 가족은 점점 혼란에 빠지지만 이미 이들의 발걸음은 돌이킬 수가 없다. 애써 부정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계속해서 서쪽을 향해 나아간다.

사실주의에 입각해 있는 존 스타인벡의 필치를 보고 있노라면, 시쳇말로 '희망고문'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희망조차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이들, 작가는 한 가족의 모습을 통해 대공황기의 소시민들의 살아남기 위한 절망들을 그려낸다. 캘리포니아로 상징되는 아메리칸 드림의 환상 속에서, 가족의 유대는 깨어지고 약한 이들은 생계를 이어가지 못해 죽어간다. 여기에는 슬픔조차 없는 이성의 마비가 있다.

"분노의 포도"는 은행의 악독한 생명력 뿐만 아니라, 일자리를 찾는 방랑자의 삶과는 무관한, 안전한 삶 속에서 보호된 이들의 모습 또한 인상적으로 담아낸다. 동정은 혐오로 변해간다. 차츰 자신의 삶을 위협하는 이방인들을 공포어린 시선으로 증오하는 이들. 시대와 사회가 만들어놓은 소유에 근거한 교묘한 방어기제. 방랑자들은 산업자본으로 인해 생활터전을 잃고, 안락한 삶을 영위하는 이들로 인해 사회에서 거부당하고 추악한 범죄자로 낙인찍힌다. 우습게도 20세기 중반에 팽배했던 레드 컴플렉스의 시발점이 된 때이기도 하다.

존 스타인벡의 고전을 교양으로만 읽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분노의 포도"에서 가장 많은 등장하는 단어가 '일자리'라는 점은 현재의 불황 속에서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분노의 포도"에서 한 가족의 구심점으로 강인하게 버텨가는 어머니는 절망하지만 않으면 어떻해든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필자 또한 이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결코 혼자 버티면서 절망하지 않길 바란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절망이란 죽음에 이르는 병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아들 톰 조드 간의 대화로 글을 맺고자 한다.

"어떤 구절인데, 톰?"
"이런 내용이예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이게 그중 한 토막이에요."
"계속 해 봐. 계속 해 봐라, 톰."
"조금만 더 할게요.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 하느니라."
(분노의 포도 2, 존 스타인벡 지음, 김승욱 옮김, '28장', 민음사, p.3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