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도 아름다웠던 금발머리의 처녀. 어려보이면서도 성숙한 외모, 무표정한 얼굴, 심각한 척 가장하는 무심함, 순수한 웃음을 지닌 개구쟁이. 아직 솜털이 보송했던 어린 시절,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의 그녀는 흠모의 대상이었고 하나의 꿈이기도 했다.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에 빛나는 1995년작 <비포 선라이즈>의 줄리 델피(Julie Delpy)에게 눈부시다는 말 이외에 어떤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까. 1995년이라는 해가 특별했던 것일까. 거리에선 서태지의 '컴백홈'이 흘러나왔으며, X세대라는 말이 한창 유행하고 있었다. 비엔나를 여행하는 프랑스 아가씨는 자유를 꿈꾸는 젊은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붙여주는 낭만이었다.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여배우로써의 줄리 델피의 모습은 이 당시의 기억이 많다. <비포 선라이즈>의 셀린느(Celine), <삼총사(The Three Musketeers, 1993)>의 콘스탄스(Constance), <화이트(Trois couleurs: Blanc; Three Colors: White, 1994)>의 도미니크(Dominique) 등 익히 알려진 필모그라피가 집중되었던 때이다. 지금은 역사로 남았지만 당시에는 최고로 불리웠던 영화잡지인 프리미어(Premiere)지에서 헐리우드에 도전하는 가장 유력한 프랑스여배우로 꼽았을 정도로, 그녀는 미래의 슈퍼스타로 기대되는 여배우였다.

하지만 그녀는 '나쁜 피'였다. 고다르(Jean-Luc Godard)의 <탐정(Detective, 1985)>으로 연기생활을 시작했으며, 레오 까락스(Leos Carax)의 <나쁜 피(Mauvais Sang; Bad blood, 1986)>와 아그네츠카 홀랜드(Agnieszka Holland)의 <유로파 유로파(Hitlerjunge Salomon; Europa Europa, 1990)> 등으로 이름이 알려졌던 그녀에게 한순간의 유명세란 그리 중요하지 않았나보다. 바라기만 했다면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할 수도 있었던 줄리 델피. 그러나 그녀는 여배우이기보다 영화학도이기를 원했고,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며 독립영화를 통해 자신의 작품세계를 만들어 나가는데에 더욱 열중했다.

한껏 영화팬들의 기대를 올려놓은 줄리 델피는 1996년부터 2006년까지 거의 10년에 이르는 동안 <비포 선셋(Before Sunset, 2004)> 이외에는 이렇다하게 대중 앞에 나선 적이 없었다. 그나마 알려진 영화가 <파리의 늑대 인간(Le Loup-garou de Paris; An American Werewolf In Paris, 1997)>이니 할 말을 잃을 지경이다. 하지만 영화들 자체는 실망스럽지 않아, <파리의 늑대 인간>부터 <파란 피(Tykho Moon, 1996)>, <하지만 나는 치어리더예요(But I'm A Cheerleader, 1999)> 등 거품이 빠진 알토란 같은 작품들로 가득하다.




그녀는 리처드 링클레이터(Richard Linklater)와 에단 호크(Ethan Hawke)를 다시 만나 방랑의 끝을 예고한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꿈을 나누었던 20대의 연인들은, 10년이 지난 <비포 선셋>에서 자신의 삶을 한탄하며 넋두리를 나눈다. 삶 속에서 잊혀져가던 기억들. 그녀의 샹송은 약간 쓸쓸하지만, 잠자고 있던 어린 시절의 낭만을 살포시 깨운다.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리고 <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2 Days in Paris, 2007)>에서 줄리 델피는 마침내 감독으로 다시 찾아왔다. 직접 감독, 각본, 편집, 주연까지 도맡아하며 그동안 숨겨왔던 욕심을 드러내보인 한 걸음이었다. 미국에서 만난 연인과 파리에 찾아온 프랑스 여자. 연인 간의 문화적 갈등이 그녀의 즐거운 달변과 함께 이어진다. 시작은 일단 가벼웠다. 어쩌면 <비포 선라이즈>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조그만 선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유럽에선 이미 개봉을 했지만 미주권과 한국에서는 아직 개봉예정인 <카운테스(The Countess, 2009)>는 그녀가 감독으로써의 역량을 시험받는 첫 무대일 것이다. 이제는 중년의 기품이 베어나는 줄리 델피는 이 작품에서도 감독 및 주연, 제작, 각본 등을 도맡아 하고 있다. 오랜 친분이 있는 에단 호크를 비롯하여, 윌리엄 허트(William Hurt)나 라다 미첼(Radha Mitchell), 다니엘 브륄(Daniel Bruhl) 등 안정된 캐스팅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장 뤽 고다르, 레오 까락스, 아그네츠카 홀랜드, 로저 애버리(Roger Avary), 크쥐스토프 키에슬로브스키(Krzysztof Kieslowski), 리차드 링클레이터, 짐 자무쉬(Jim Jarmusch), 라세 할스트롬(Lasse Hallstrom), 지호 리(Jieho Lee) 등등. 줄리 델피가 오랫동안 떠돌아 다니며 만난 감독들이다. 유명해지기보다는 자유롭기를 원했고, 한순간의 뜨거움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잊혀져가기를 원했던 그녀. 방황의 끝에서 만날 <카운테스>를 시작으로, 앞으로 피어날 감독으로써의 모습에 가슴이 두근두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