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에비타(Evita)>는 아르헨티나를 떠올릴 때, 아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들 중 하나일 것이다. 1946년부터 1955년까지 이어진 페론(Juan Domingo Peron)의 통치기는 마치 한국의 박정희를 떠올리게 하는 시기로, 여러가지 평가가 엇갈리지만 이후의 아르헨티나 역사를 고려해보면 그나마 나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계속되는 쿠데타와 끝없는 정치불안은 1976년 비델라(Jorge Rafael Videla) 정권을 낳았으며, 1976년에서 1981년까지의 비델라 정권기는 한국의 제5공화국 시기와 유사하여, 각종 경제정책의 추진으로 인한 경제활성화의 이면에 계엄령의 발동, 반대파 숙청 등의 정치적 우울함으로 가득찼던 때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1977(Crónica de una fuga)>은 바로 이 비델라 정권기인 1977년에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살고 있는 클라우디오(로드리고 드 라 세르나)는 B리그 축구팀의 골키퍼이다. 여느 날처럼 고된 훈련을 마치고 집에 돌라온 클라우디오를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남자들. 이들은 클라우디오를 교외의 '아틸라'라는 장소로 끌고가 감금한다. 고문과 폭행에 시달리던 클라우디오는 자신과 함께 감금된 이들 중의 한 명이 자신의 이름을 말했기에 끌려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감금된 이들 중의 몇몇은 '아틸라'를 빠져나가기 위해 근거없는 밀고와 배신을 서슴치 않는다.

클라우디오와 함께 감금된 나신의 죄수들은 고문과 배신 속에 한명 한명 죽거나 풀려나 4명만이 남게 된다. 감금된지 어느덧 4개월, 이들의 죽음은 마치 불을 보듯 빤히 다가온 듯 하다. 클라우디오를 포함한 4명은 마침내 목숨을 건 아슬아슬한 탈출을 시도한다. 폭풍우가 밀려오는 밤, 창문을 부수고 탈출하는 이들의 발걸음 속에는 두려움이 가득하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1977>의 장면은 충격이라는 말조차 모자라다. 살아남은 이들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인간성이라는 말은 사치로 느껴질 뿐이다. 인간은 자신과 비슷하고 가까울수록 더 잔인해지는 것 같다. 마지막 장면에서 클라우디오가 보여주는 눈빛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그것 하나로 집약된다. 모든 감정을 다 보여주는 눈빛. 이 작품은 감동하기에는 너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