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은 불안이 되고, 불안은 공포가 된다. 공포는 광기가 되어 낙인을 찍고, 낙인은 이내 폭력이 되어 상처를 남긴다. 상처는 쉽게 치유될 수가 없다. 깊게 남은 상처는 고독이 되어, 다시금 의심을 퍼뜨려놓는다. 누가 사냥하는 자이고, 누가 사냥당하는 자인가. 평온함. 일상의 평온함은 의심과 불안, 공포, 광기, 낙인, 폭력, 상처, 고독을 사랑의 이름으로 감추어놓는다. 누구도 주저하지 않는다. 비록 친구나 애인일지라도 그에게 총구를 겨누는 데에는 아무런 거리낌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는 배척당한 자이기 때문이다.

폭력은 때로는 인간에게 무서운 얼굴을 보이면서 미친 듯이 큰 피해를 주지만, 또 때로는 온화한 빛으로 나타나 그 주위에다 희생이라는 선행을 베풀기도 한다. (...중략...) 폭력은 만장일치적이기 때문에 질서와 평화를 회복시킨다.
- "폭력과 성스러움", '제1장 희생~제3장 외디푸스와 희생양', 르네 지라르 지음, 김진식, 박무호 옮김, 민음사, p.59-p129

그가 진정으로 나쁜 사람인가는 결국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어떤 이유로든 그가 '선택'되었다는 사실이다. 과도한 해석일지는 모르겠지만, "더 헌트"의 시점이 크리스마스라는 명절과 사냥시즌,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인식이라는 또 다른 비일상적 시간을 배경으로 한다는 건 상당한 의미가 있어 보인다.

비일상적 시간에 대한 갈구. 그는 희생물로써 매우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대상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더 헌트"는 아이, 청소년, 성인, 노인을 가리지 않는 인간 내면의 폭력을 관찰하려 한다. 마녀사냥은 희생제의에 다름아니다. 더욱 견고한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 그는 피를 흘려야만 한다.

그가 억울한가? 물론 그렇다. 그렇지만 만약 그가 또 억울한 누명을 쓰지 않았더라면, 또 어떠했을까? 만약 그가 정말로 나쁜 사람이었더라면,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집단적 폭력이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폭력에는 사실상 아무런 이유가 없다. 폭력으로 향하기까지의 합리화만이 있을 뿐이다. 원시시대의 제의나, 중세의 마녀사냥이나, 또한 현대 사회의 어떠한 집단성이나, 결국 본질에 있어서는 별로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인간사회는 모두가 함께 미워할 수 있는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이성이든 감성이든, 인간 내면의 폭력을 잠재우기에 그 목소리는 너무 미약하기만 하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단어가 인간의 잔인함을 숨겨놓는 효과적인 도피처로 이용되고 있는 건 아닌지, 가끔씩 의심될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