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오래된 영화는 또 하나의 오래된 작품 "세일즈맨의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희곡 원작의 "세일즈맨의 죽음"이 현대사회의 정상인들이 주인공들이라면, 소설 원작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현대사회의 비정상인들이 주인공이다. 이 오래된 두 작품들은 현대사회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말하고 싶을 때 말하고, 말하고 싶지 않을 때 말하지 않는 건 곧 비정상이 된다. 마음에 있는 말을 했을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혼자 있고 싶을 때 혼자 있다거나, 앉아있기 싫을 때 앉아있지 않는 게 곧 비정상이 되고, 부당하다고 생각될 때 화내거나, 그저 조금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한 약간의 일탈 역시 비정상이다.

말하기 싫을 때도 말하고, 말하고 싶을 때 하지 않는 게 곧 정상이다. 마음에 있는 말은 그저 마음 속에서만 해야 한다. 혼자 있고 싶을 때에도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하고, 앉아있기 싫을 때도 앉아 있어야 정상이고, 부당하다고 생각될 때도 화를 내면 안 될 뿐더러, 어떤 경우에도 규칙에 따를 때에만 정상이 된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조용히 다른 사람들과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사회는 판단한다. 정상이 되었다고.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어느 레지스탕스의 "분노하라"는 단순한 외침이 왜 그렇게나 큰 울림이 되어가는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어쩌면 어느샌가 분노의 감정 역시 비정상이 되어버렸던 게 아닐지. 아니 어쩌면 감정 자체가 비정상적인 어떤 것이 되어버렸던 건 아닐지, 삶을 통해 어떠한 감동도 느끼지 못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던 건 아닐지, 오직 무얼해야 한다는 강박만이 가득한 채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했던 건 아닐지, "어쨌든 시도는 해봤잖아. 최소한 노력은 해봤다구.But I tried goddammit. At least I did that."라는 화난 음성 속에서 따끔함을 느끼게 된다.

"뻐꾸기 둥지 위로 올라간 새"의 비정상인들이 바라는 건 어떤 대단한 것들이 아니다. 그저 야구가 보고 싶을 뿐이고, 사랑을 하고 싶어할 뿐이다. 그걸 미쳤다고 부르는 세상이라면, 자유라는 단어에도 비정상이라는 뜻을 덧붙여야 하는 게 아닐까. 하긴 자유라는 단어가 이미 경쟁할 자유, 돈을 벌 자유로 한정되어 버리긴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