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이 사는 성으로 부름을 받은 두 남자가 말을 타고 여행길에 오른다. 기나긴 여행길이 지루한 로젠크랜츠(게리 올드만; Gary Oldman)는 계속해서 동전을 던진다. 앞면, 앞면, 앞면, 연속으로 앞면만이 나오는 동전에 신기해하는 그를 길덴스턴(팀 로스; Tim Roth)은 어처구니 없다는 눈길로 바라본다. 하지만 157번이나 이어지는 똑같은 결과에 두 사람의 표정은 점차 경악으로 바뀌어간다.

<로젠크랜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 (Rosencrantz And Guildenstern Are Dead, 1990)>는 1966년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톰 스토파드(Tom Stoppard)에 의해 각색 및 초연된 패러디물로, 영국과 브로드웨이를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1990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영화화된 독특한 형식의 극작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잠깐 등장하는 햄릿의 어릴 적 친구들, 로젠크랜츠와 길덴스턴을 일약 주인공으로 만든 이 부조리희비극은 동전의 양면과 광기에 사로잡힌 햄릿을 교차하며 어처구니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현실 속의 모순들에 대한 통찰을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비슷한 두 남자, 하지만 또 완전히 다른 두 남자. <햄릿>에서 너무나도 미약한 역할이었기에 서로의 이름조차 헷갈려하는 두 남자라지만, 확연히 달라진 비중은 그들의 성격 또한 확연히 구분지어놓는다. 현실에서 나타나는 불합리성에 어떠한 의문을 갖기보단 오히려 즐기는 듯 보이는 로젠크랜츠, 그리고 그런 그에게 소리를 지르며 여러가지 가정과 의문을 제기하는 길덴스턴.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은 원작에서 지닌 똑같은 역할로 인해 갈등을 빚고 또 서로를 수렴한다.

비록 '안과 밖이 바뀌듯' 주인공과 엑스트라의 위치가 바뀌었다지만, <로젠크랜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는 <햄릿>의 기본틀 안에서 충실하게 진행된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숨기려고 들거나 반전을 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일찌감치 플롯의 가능성을 닫아버리고, 두 남자가 겪는 상황과 대화에 더욱 집중한다. 무거운 공과 깃털을 동시에 떨어뜨리거나 매달린 화분으로 진자운동을 시도하며 뉴튼으로 상징되는 합리성을 여지없이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리는가하면, 테니스의 공처럼 네트를 사이에 두고 질문을 주고 받는 게임과 연극 안에서 연극을, 그리고 연극 안에서 또 다른 연극을 하며 언어와 한계와 빠져나갈 수 없는 틀을 압축적으로 은유하는 등, 이 작품에서는 이야기는 본래의 중요성을 잃은 하나의 장치에 불과해진다.

과연 157번동안 연속으로 동전이 앞면이 나오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혹시 무언가 대단한 사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지 주인공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고민을 거듭한다. 말도 안되지만 분명 실현가능한 확률의 놀이. 하지만 이러한 우연은 결국 아무런 의미도 발견할 수 없는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로젠크랜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는 냉소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또한 말도 안 되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1990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닮은 점이 전혀 없지만, 이상하게도 <매그놀리아(Magnolia, 1999)>를 떠올리게끔 하는 작품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