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위키피디아


비밀의 아이들. <렛 미 인(Let the Right One In, 2008)>의 외로운 소년은 옆집의 이상한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아임 낫 스케어드(I'm Not Scared, 2003)>의 호기심 많은 소년은 어두운 동굴 안에 갖혀있던 이상한 소년을 위한 수호천사가 된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난 낯선 아이들

하얗게 눈이 쌓인 스웨덴의 한 작은 마을, <렛 미 인>의 소년 오스카는 항상 혼자서 시간을 달래던 집 앞의 공터에서 한 소녀를 만난다. 소녀는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 추운 겨울날에도 얇은 옷만 걸치고 있고, 늘 어렵기만 하던 루빅큐브를 순식간에 맞추는가 하면, 기껏 생각해서 사온 사탕에도 시큰둥한 표정이다. 늘 어색하고 짧은 대화 뿐이지만, 그럼에도 소년과 소녀는 매일마다 시간을 함께 하며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져간다.

노란 대지가 시원스레 펼쳐진 남부 이탈리아의 한 농장, <아임 낫 스케어드>의 소년 미카엘은 친구들과 들판을 뛰어다니다 땅 밑의 이상한 동굴을 발견한다. 호기심을 느끼고 어두운 동굴 안을 들여다보던 미카엘은, 갑작스레 튀어나온 한 소년에게 겁을 먹고 줄행랑을 친다. 며칠이 지나 미카엘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금 동굴에 찾아간다. 까만 모포를 쓴 채 눈도 거의 뜨지 못하는 소년에게 미카엘은 연민의 마음을 품게 된다.





하얀색와 노란색 : 토마스 알프레드슨(Tomas Alfredson)과 가브리엘 살바토레(Gabriele Salvatores)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아름다운 두 편의 동화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건 색조의 차이이다. <렛 미 인>이 겨울이라면, <아임 낫 스케어드>는 여름이다. <렛 미 인>이 클래식기타라면, <아임 낫 스케어드>는 바이올린이다. <렛 미 인>에선 감정도, 대사도 모두 하얀 색조를 지닌다. 정적으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안에서 불안은 팽팽한 긴장감을 이룬다. 이 한 편의 영화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은 마치 정지된 사진처럼 차분한 영상미로 순수 안에 드리워진 광기를 이야기한다.

"오스카... 받은만큼 돌려줘."

반면 <아임 낫 스케어드>는 바람에 흔들리는 노란 작물들의 율동감으로 가득하다. 잔뜩 날을 세운 바이올린 선율은 신경을 자극하고, 끊임없이 변주되는 파헬벨의 캐논은 시시각각 화면을 다양한 색채로 이끌어간다. 현재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거장 중 한 사람인 가브리엘 살바토레는 운율감으로 가득한 터너의 풍경화처럼 풍부한 색조로 순수한 아이와 저열한 어른 간의 화해할 수 없는 시선을 대립시킨다.

"그런 거 생각하지 마라. 다 잊어버려."



너를 떠나지 않아 : 오스카(카레 헤데브란트; Kare Hedebrant)와 미카엘(쥬세페 크리스티아노; Giuseppe Cristiano)

두 영화 모두 소년이 주인공이지만, 이들의 성격은 영화의 색조만큼이나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렛 미 인>의 하얀색은 오스카로 인해 더욱 하얗게 빛을 발한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와 머리결을 지닌 오스카는 외모만큼이나 성격 또한 하얀 백지처럼 이엘리와의 만남에 의해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같은 반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도 아무 말도 못했던 소년, 하지만 처음으로 자기의 말을 들어주는 소녀를 만나고 소년은 변해가기 시작한다. 책을 좋아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던 오스카에게 어느덧 이엘리는 세상의 전부가 된다. 이상하지만, 어쨌든 유일한 대화상대이자, 친구, 또 애인인 이엘리를 위해 오스카는 강해지기로 마음먹는다. 방과 후 웨이트 트레이닝에도 등록을 하고, 소녀의 충고에 따라 자신을 괴롭히던 아이들을 혼내주곤 자신감에 가득찬 소년에게선 더 이상 소심하게 나무를 찌르던 예전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냥 손가락을 살짝 찌르면 돼."

눈 내리는 도시의 밤이 주조를 이루는 <렛 미 인>의 오스카와는 달리, 평화로운 농장에서 뛰어놀며 자란 미카엘은 건강한 아이다운 매력을 맘껏 발산한다. 호기심 많고, 여동생을 끔찍히도 아끼는 소년. 어설프지만 그래도 옳은 행동들을 하고 싶어하는 미카엘의 성격은 아이들의 짖굳은 놀이를 담은 첫 장면으로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사나이였어. 그는 절벽도 걸을 수 있어. 만약 떨어져서 다치더라도 멋진 남자가 될 거야."

동굴 안의 소년 필리포를 만난 후에도 미카엘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소년들의 특이한 우정은 오히려 변해가는 집 안의 분위기와 대조를 이루며 한 폭의 회화가 된다. 익숙하고 다정했던 사람들은 점차 미카엘에게 실망이 되어가고, 답답한 집 안에서 나와 자전거를 타고 새처럼 자유를 꿈꾸는 소년에게 어머니가 위로의 말을 건낸다.

"잘 들어. 네가 어른이 되면 여길 떠나게 해준다고 약속할게."




나를 지켜줄거야? : 이엘리(리나 레안데르손; Lina Leandersson)와 필리포(마티아 디 피에로; Mattia Di Pierro)

소년의 인생을 송두리채 바꾸어버리는 만남. <렛 미 인>의 히로인 이엘리는 좀처럼 표정을 드러낼 줄 모른다. 어떻게라도 가까워지고 싶은 오스카의 안타까운 노력에도 무뚝뚝한 반응이지만, 그래도 오스카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는다. 늘 곁에서 자신을 돌보아주던 보호자를 잃어버린 어느날 밤, 소녀는 소년의 창문에다 노크를 한다. 소년의 곁에 누워 느닷없는 고백을 받은 소녀는 마침내 소년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기로 결심하곤 질문을 던진다.

"내가 여자가 아니었어도... 어쨌든 날 좋아할거지?"

아무리 음식을 가져다줘도 고마워할 줄 모른다. <렛 미 인>의 이엘리와 <아임 낫 스케어드>의 필리포의 묘한 공통점이다. 미카엘은 고기를 몰래 숨겨오기도 하고 자기 용돈을 털어 과자를 사다주기도 하지만, 필리포는 알 수 없는 소리만 반복하며 화를 내기가 일쑤이다. 어두운 동굴을 죽음의 장소로 생각하는 필리포는 두려움에 잔뜩 질려 눈을 꼭 감고만 있다. 수척해진 소년에게 손을 내미는 소년. 미카엘의 얼굴을 더듬으며 자기가 살아있음을 확인한 필리포는 그제서야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보인다.

"네가 다시 올 줄 알았어, 너구리가 그렇게 얘기해 줬거든."





만나지 말란 말야! : 호칸(페르 라그나르; Per Ragnar)과 피노(디노 아브레스치아; Dino Abbrescia)

동화 안에 드리운 어두운 현실의 빛깔. 오스카와 이엘리의 만남도, 미카엘과 필리폰의 만남도 영 탐탁치않아 하는 어른들이 있다. 하지만 이유는 사뭇 다르다. <렛 미 인>의 호칸은 이엘리를 너무 사랑하기에 오스카를 질투한다.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 그리고 그로 인해 벗어날 수 없는 죄의 무게. 이엘리의 생명을 위해 호칸은 자신을 희생하지만, 그의 사랑은 스스로를 불태워서야 겨우 자유로울 수 있는 일그러진 모습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호칸이 이엘리에게 어렵게 부탁하는 한 마디에선 너무나도 순수했던 악한의 진실을 엿볼 수 있다.

"그 아이 오늘밤은 안 만나면 안될까?"

<아임 낫 스케어드>의 경우엔 동명의 원작이 실제로 1970년대에 이탈리아 전역에 만연했던 실화들을 바탕으로 하였기에 보다 짙은 현실색이 감돈다. 속물적이고 어리석은 이기심으로 가득한 어른들. 미카엘의 아버지 피노 역시 가족을 아끼고 정다운 인물이지만, 속물적인 허세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가 아이들에게 호기롭게 말하던 이야기들은 고작해야 스스로의 비겁함을 숨기기 위한 위선에 불과해지고, 안타깝게도 그러한 위선들은 상황을 점점 더 불행을 향한 덫으로 이끌어간다.

"전쟁터에서 위험한 작전에 나갈 사람을 어떻게 결정하는지 아니? 성냥뽑기에서 부러진 걸 뽑는 사람이 가는 거란다."



어리석은 현실에서 탈출을 꿈꾸다

두 영화는 어조도 색조도 다르지만, 어두운 인간사회의 모습을 아름답고 감동적인 동화로 바꾸어낸다. <렛 미 인>은 이미 전세계의 열광이 입증했듯이, 과장되지 않은 절제의 미학으로 부정적인 인간성에 대한 탁월한 접근을 보여주었다. 별달리 새로울 것도 없는 뱀파이어라는 소재는 차분하고 정적인 영상 안에서도 충분히 신선할 수 있었고, 오로지 '진짜같음'에만 연연해왔던 현재의 영화계에도 의미있는 파문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2004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건진 보물, <아임 낫 스케어드>는 영화관에서 걸어나오면서 친구에게 '가장 완벽한 영화'를 봤다고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호러와 코미디, 드라마와 스릴러를 가로지르는 동화는 <지중해(Mediterraneo, 1991)>에서 선보였던 도피의 테마를 연상시키며 깊은 향기를 남긴다. 두 가지의 비밀을 담은 두 가지의 이야기. 하지만 진정한 비밀은 눈에 빤히 보이는 현실과 인간의 마음 속에 있었다.

"빌보는 그림자 속으로부터 미끄러져나와 ... 태양을 피해 빠르고 조용하게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