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눈망울을 지닌 소녀. 작은 키로 똑부러지게 바라보는 시선. 귀여운 표정으로 내뱉는 거침없는 언변. 주연보다는 조연으로 더욱 빛을 발했던 크리스티나 리치(Christina Ricci). 똘망똘망한 눈빛을 지닌 그녀를 볼 때면, 어딘지 모르게 성격파배우 스티브 부세미가 떠오르곤 한다.

온실 속의 화초의 느낌이었던 샤를리즈 테론이 제대로 망가지며 에일린 우르노스(Aileen Wuornos)을 연기해냈던 2003년작 <몬스터(Monster)>. 그녀가 오스카와 골든글로브, 베를린을 휩쓸고 있을 때, 그 옆에서 환한 미소로 축하해주는 여배우가 있었다. 샤를리즈 테론이 수상소감에서도 말했듯이, 크리스티나 리치의 숨어있는 연기는 샤를리즈 테론이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지지대와도 같았다.

크리스티나 리치는 이미 10살 때 <귀여운 바람둥이(Mermaids, 1990)>에서 아역스타로 데뷔하여 탄탄대로를 걸어갔다. 한 때 공존의 히트를 기록했던 <안녕, 프란체스카>의 모티브가 된 영화 <아담스 패밀리(The Addams Family, 1991, 1993)>에서 엽기적인 딸 웬즈데이 아담스(Wednesday Addams) 역을 맡으며 관객들의 눈도장을 받았다. 1995년은 그녀의 너무 빠른 전성기와 같아서, 데미 무어와 멜라니 그리피스 등 당시 헐리우드 최고의 미녀들이 모두 모여 화제가 되었던 성장영화 <나우 앤 덴(Now and Then)>의 한 켠을 장식하기도 했으며, <꼬마 유령 캐스퍼(Casper)>의 주역 캣을 맡아 대흥행을 기록하기도 한다.




제인 오스틴 원작의 <센스, 센서빌러티(Sense and Sensibility, 1995)>로 보수적인 아카데미에 대한 숱한 논쟁을 낳으며 한창 주가를 높여가던 이안 감독의 1997년작 <아이스 스톰(The Ice Storm)>을 통해 그녀는 본격적인 성인연기자로써의 준비를 하게 된다. 이어진 <버팔로 '66(Buffalo '66, 1998)>과 <섹스의 반대말(The Opposite Of Sex, 1998)>에서의 호연으로 골든글로브와 선댄스영화제에 초청을 받는 등, 그녀의 계속되는 질주는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이 때까지의 크리스티나 리치의 필모그라피를 찬찬히 살펴보면, 천재 아역배우로 일컬어지는 다코타 패닝에 버금갈만한 수준의 연기력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이른 성공이었던 것일까. 시애틀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1998년의 활발한 활동을 정점으로, 이후 그녀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들은 대부분 흥행에 실패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비평가의 혹평을 견뎌내야만 했다. 성인연기자로써의 첫 출발이었던 <슬리피 할로우(Sleepy Hollow, 1999)>는 비평가들의 엇갈리는 평가로 부유했으며, 일전에 소개했던 <판타스틱 소녀백서(Ghost World, 2001)>에서는 안타깝게도 나이 때문에 도라 버치에게 주연을 양보해야 하기도 했다.

조니 뎁과 다시 호흡을 맞춘 영화 <맨 후 크라이드(The Man Who Cried, 2000)>는 화려한 캐스팅과 괜찮은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흥행에는 참패했으며, 우디 앨런의 <애니씽 엘스(Anything else; la vie et tout le reste, 2003)>에서도 나쁘지 않은 모습을 선보였으나 제대로 평가받을만한 기회는 얻지 못했다. 그나마 2002년의 미국드라마 <앨리 맥빌(Ally McBeal)>의 마지막 에피소드들에 출연하며 톡톡 튀며 강단있는 캐릭터를 잘 소화해냈지만, 완전한 매력을 보여주기에는 너무 짧은 등장이었다.




2003년의 <몬스터>는 그녀의 호연이 오히려 발목을 잡은 결과가 되었다. 어정쩡하고 우유부단한 셸비(Selby)역을 맡아 선이 굵은 샤를리즈 테론의 연기에 빛을 더해주었지만, 덕분에 정작 크리스티나 리치는 음지 속에 머무른채 잊혀져버렸다. 성폭행 당한 여성이라는 어려운 역할을 맡아 좋은 연기를 선보였던 <블랙 스네이크 몬(Black Snake Moan, 2006)> 또한 별다른 흥행실적을 올리지 못한 채 선댄스영화제 관객상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이제 곧 30살에 접어드는 크리스티나 리치는 최근 몇년간 우울한 필모그래피를 이어왔다. 조만간 개봉예정인 옴니버스 영화 <사랑해 파리(Paris, je t'aime; Paris, I Love You, 2006)>의 두 번째 버젼 <뉴욕 아이러브유(New York, I Love You, 2009)>가 그녀의 배우인생의 한 전환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작은 키와 어려보이는 외모에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그녀라지만, 이대로 스포트라이트조차 한 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채 사라지기엔 너무나도 큰 아쉬움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찬찬히 커리어를 쌓아온 나탈리 포트만이 받을만한 조명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스티브 부세미와 같은 성격파 배우로써 거듭날 수 있을만한 역량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오랜 팬의 한 사람으로써 스크린에서 꾸준히 크리스티나 리치의 좋은 모습을 찾아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