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 스티븐 소더버그(Steven Soderbergh) 감독은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와 같은 말썽꾸러기였다.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Sex, Lies, and Videotape)>부터 시작한 그의 필모그라피는 언제나 문제작들이었고, 또한 화제의 대상이었다. 체 게바라의 일대기를 다룬 <체(Che)>에 이어 내후년 개봉예정인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이야기 <클레오(Cleo)>까지, 이제는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은 그에게 <에린 브로코비치(Erin Brockovich)>는 하나의 큰 전환점과도 같은 영화였다.

<마이클 클레이튼(Michael Clayton)>이 실화 같은 픽션이라면, 에린 브로코비치는 거짓말 같은 실화이다. 대기업 PG&E의 공장에서 나오는 유해물질과 그로 인해 건강을 위협받게 된 마을 주민들. 막무가내로 변호사 사무실에 찾아가 취업을 시켜달라고 쌩때를 쓰는 철없고 억척스러운 아줌마 에린 브로코비치가 우연히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서 미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대기업소송이 진행되게 된다.

<에린 브로코비치>는 스티븐 소더버그 뿐만 아니라 줄리아 로버츠에게도 연기파 배우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안겨주었다. <펠리칸 브리프(Pelican Brief)>나 <메리 라일리(Mary Reilly)> 등에서 꾸준히 변신을 시도했으나 그다지 호평을 얻어내지 못했던 그녀는, 이 영화를 통해 스티븐 소더버그와의 긴 인연을 맺게 되었고 이후 <컨페션(Confessions of a Dangerous Mind)>과 <클로저(Closer)> 등에서 확연한 존재감을 각인시키게 된다.

줄리아 로버츠, 그리고 조지 클루니와 캐서린 제타 존스, 맷 데이먼에 이르기까지 유독 작품운이 없던 배우들을 스타로 만들며 미국판 장진 패밀리를 만들어가고 있는 스티븐 소더버그.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의 리차드 링클레이터(Richard Linklater)나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의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벨벳 골드마인(Velvet Goldmine)>의 토드 헤인즈(Todd Haynes) 등 그와 인연을 맺고 있는 감독들 또한 쟁쟁하기 그지없다. <에린 브로코비치>는 작품 자체만으로 뛰어나지만, 헐리우드 역사의 한 장을 긋는 이정표와 같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