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데블스 에드버킷, 1997>에서 알 파치노는 인간의 자유의지(Free will)를 말한다. 인간의 자유의지, 이 단어는 라스 폰 트리에를 떠올리게 한다. 비록 그의 작품을 모두 챙겨본 것은 아니지만, <유로파, 1991>부터 <브레이킹 더 웨이브, 1996>, <어둠 속의 댄서, 2000>들을 거쳐 <도그빌, 2003>과 <만덜레이, 2005>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자유의지에 상당히 도전적인 질문은 던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라스 폰 트리에가 앞서 언급한 영화들에서 전반적으로 그려내는 자유의지라는 것은 비인간적일정도로 극대화된 희생으로 나타난다. 자신이 사랑하는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부조리한 희생이 댓가로 따른다. 이치에 맞지 않고, 비상식적인, 아마 라스 폰 트리에의 새 영화들이 발표될 때마다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는 데에는 이러한 이유도 한 몫을 하고 있을 듯 하다. 우연적이면서도 운명적인 선택들,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은 끊임없이 희생을 강요받는다. 게다가 선택의 상황은 가혹하기 그지 없으며, 또한 합리화의 덧 속에서 자유의지의 이름을 걸고 작동한다. 절박한 벼랑 끝으로 밀어내는 선택들, 어느 쪽도 선택하기 힘든 극한 상황들이 이어진다. 주인공들의 비상식적인 모습들과 더할나위없는 괴로움 속에서 그들의 자유의지는 하나의 거대한 소망으로 다가온다. 소망은 상황과 맞물려 절박할 뿐만 아니라, <브레이킹 더 웨이브>의 베스(에밀리 왓슨)와 <어둠 속의 댄서>의 셀마(비욕)가 보여주는 희생은 성스럽다고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도그빌>은 아마도 라스 폰 트리에가 가진 자유의지에 대한 질문을 가장 극한으로 밀고 간 작품이 아닐까 싶다. 선택의 자유가 실제로는 강요된 희생을 감추기 위한 인간의 합리화에 불과하다는 듯, 보다 가혹하게 주인공을 더욱 더 몰아붙인다. 어떠한 다른 선택에 대한 가능성을 하나 하나씩 깨어나가며 그들만의 일방적인 선택을 강요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서 소름이 돋는다. 그레이스(니콜 키드먼)에겐 <어둠 속의 댄서>에서조차도 존재했던, 진심으로 그녀를 도와주고자 하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나마 믿고 의지했던 한 사람은 우유부단하고 자기 자신밖에 모르며, 그러면서도 도덕적인 체 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하고 있던 사람일 뿐이었다. 그레이스의 아버지가 말하듯, 그녀가 베풀고자 했던 관용은 곧 오만이 되어버린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된 동정어린 오만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차 안에서 이루어지는 아버지와의 대화는 묘한 긴장감을 준다. 마을 사람들의 모습과 그녀가 교묘하게 교차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마지막까지 마을사람들에게 선택을 강요받는다. 오만을 베풀고자했던, 일말의 자존심까지 무너뜨려 버리기에, 영화의 엔딩은 한없이 처절하고 슬퍼보인다.

<도그빌>의 후속작 <만덜레이>는 비록 작품성이나 라스 폰 트리에가 가진 특유의 날카로움 감각은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레이스(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를 통해 보여주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집요한 질문은 여전히 유효했다. 노예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그녀의 노력들은 결국 자신이 노예들에 의해 노예화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되어버린다. 레비 스트로스가 "슬픈 열대"에서 인도를 회상하며 자조적으로 말하듯이 인간이 보여주는 모습들은 결국 주어진 환경 속에서 인간들 스스로가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 놓은 공고화된 타협일 뿐일지도 모른다.

자유의지에 대한 오만, 이것은 아마도 현대인들이 만들어놓은 가장 큰 언어적 환상일 수도 있다. 어느 순간에도 자신의 의지에만 기반한 선택은 있을 수 없다. 언제나 환경이 있고, 사회가 있으며, 그리고 자신이 처해진 상황이 있는 것이다. 수많은 길이 봉쇄당하고, 몇 개의 길만이 갈 수 있도록 허용되어 있을 뿐이다. 사실상 의지라는 개념 자체가 과거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통제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의지는 과거 속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과거로부터 해방된 현재의 의지가 있다고 믿고 싶으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확인받으려 하지 않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