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흥섭, Windowvista, 디지털 프린트, 65*99cm, 2009
출처 : 네오룩닷컴

일시 : 2009.11.26~2009.12.23
장소 : 갤러리 마크(청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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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반, 기술은 과거를 부정하며 청사진을 만들어나갔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barkeit, 1935)"에서 대량생산이 가능한 기술발전으로 대중문화의 가능성을 엿보았고, 하루가 다르게 진화해가는 기술들의 수혜에 힘입은 미디어아티스트들은 아카데미의 권위를 파괴해나가며 창작의 영역을 공공으로 확대해나갔다.

하지만 정흥섭 작가는 기술낙관주의에 대해 정면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생산성 역설(Productivity paradox)은 산업 뿐만 아니라 문화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train>에서 그는 1초의 시간차를 지난 복제된 영상으로 두 개의 다른 창을 통해 바라보는 듯한 착각을 유도한다. 비약적으로 정보가 증가해가는 인터넷에 대한 은유, 선택의 자유가 늘어갈수록 정보는 점점 더 선택받아진 것으로 제한되어진다.

앞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요즘은 이미지와 함께 영상이미지가 충만한 시대인 것 같습니다. 하루가 24시간이라면 하루에도 24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영상물들이 각종 미디어를 통해 쏟아져 나오고 있지요. 특별히 인터넷 공간이 이를 극대화하는 곳인 것 같아요. 하지만 현실을 뒤덮고도 남을만한 엄청난 양에 비해 읽혀지는 영상코드는 굉장히 획일적인 것을 발견했는데요. 공간지각적인 코드입니다. 동영상이라는 말 자체에서도 벌써 움직임을 통해 영상을 판독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현실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뒤로하고 현대사회의 속도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이 분주한 움직임은 현대의 영상 속에서 지배적인 것 같습니다. (앨리스온과의 인터뷰 중, 전문보기, 2009.03.02)

기술발전의 가능성 속에 숨겨진 한계를 고찰했던 기획전, <미디어아트, 전기나갔을 때 대처방안(Lack of Electricity)>의 참여작 <디지털 화석(Digital Fossil)>에서 작가의 언어는 보다 분명해진다. 3D로 랜더링된 단추는 지속적으로 종이에 프린트되며, 이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의 흔적은 화석처럼 남는다. 진짜 단추도 되지 못한 채 두껍게 쌓이기만 한 종이더미는 기술에 함몰된 감성을 무미건조하게 증언한다.

정흥섭, Digital fossil, 디지털 프린트&애니메이션, 84×150cm, 27×41cm, 2009
출처 : 네오룩닷컴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Windowvista>나 <explosion> 등은 기술이 집약되며 주목되던 프로젝트들에 대한 실망감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 차세대 OS로 대대적으로 광고를 펼쳤던 윈도우 비스타의 참혹한 실패는 <Windowvista>의 휴지통으로 비꼬아지고, 컴퓨터그래픽에 대한 기대를 잔뜩 부풀렸던 영화 <스타워즈(Star Wars, 1977~2005)>의 폭발장면은 재활용되어 실체화된 나사에 불과해진다. 기술에 대한 기대감을 모으며 스펙타클만이 남발된 작품들은 상상력의 한계만을 여실히 드러냈을 뿐이었다.

가장 원초적인 매체인 종이로 작업하는 정흥섭 작가의 언어에는 매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이는 '미디어가 곧 메시지다(The Medium is the Message)'라는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의 테제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기도 하다. 기술발전이 삶의 모습을 변하게 만들었다는 것만큼 분명하지만, 과연 삶에 대한 태도까지도 바꾸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엇(what)을 압도하는 어떻게(how)는 예송논쟁의 재탕일지도 모른다. 단지 기술이 예절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게 굳이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