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09.10.07~2009.10.30
장소 : UNC 갤러리(청담)

제1, 2차 세계 대전의 주요한 방어전술로 사용되었던 진지전(War of Position). 다소 낯선 어휘처럼 느껴지지만, 전쟁영화에서 참호 속에 들어가서 싸우는 군인의 모습을 그린 장면쯤은 그리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듯 하다. 프랑스의 마지노선이라든지, 몇 해 전 인기를 끌었던 미국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에서 보여주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의 독일군 방벽이 진지전의 가장 유명한 예들이다.

하지만 전차나 비행기 등의 비약적인 기술발전은 참호방어를 무용하게 만들었고, 그에 따라 진지전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의 종료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독일의 사진작가 에라스무스 쉬뢰터(Erasmus Schroter)는 마치 폐허처럼 남은 참호를 따라 걷는다. 우울한 역사의 흔적들, 그렇지만 그의 발걸음은 우울하기보다는 낭만적이다.

에라스무스 쉬뢰터의 사진작업에 대한 이해는 그가 언제 어디서 작업을 했느냐가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구 동독(독일민주공화국; 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태어나 30살의 나이에 구 서독으로 망명한 이력만큼이나, 독일현대사가 그에게 끼친 영향은 무시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가령 1980-81년 구 동독에서 적외선카메라로 인물을 촬영한 <Infrared Night Shots> 연작의 경우, 어둠이 짙게 깔린 독일사회의 말해지지 않는 공포와 불안이 기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번 <From Leipzig>전에서는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된 1990년 이후의 연작 <Bunker>를 만나볼 수 있다. 에라스무스 쉬뢰터는 독일의 통일 이후 마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정리하듯 제2차 세계 대전의 흔적들에 다가간다. 원색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참호는 어둠이 옅게 깔린 하늘 아래 마치 고대의 유적인양 찬연히 빛을 발한다. 그는 태어나고 자란 라이프치히의 시절들을 기억나지도 않을 먼 옛 일로 미뤄놓으며, 우울한 독일현대사를 증언하는 폐허들 또한 아득한 시선으로 정리해나간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희망. 에라스무스 쉬뢰터는 하나씩 과거를 찾아다니며 지워버린다. <From Leipzig>전에서는 비록 만나볼 수 없지만 <Bunker> 연작과 비슷한 맥락의 <Waffen>에서는 무기들 또한 유적에 불과해진다. 그는 진지전이 역사로 남았듯, 참호와 무기들도 역사에만 남길 바라는 듯 하다. 역사의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 관찰자이기를 바라는 에라스무스 쉬뢰터는 슬픈 낭만주의자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