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기억의 홍수, 장지에 혼합재료, 145×112cm, 2009
출처 : 네오룩닷컴

일시 : 2009.09.17~2009.09.30
장소 : 아트스페이스 에이치(Artspace H)

요즘 갤러리를 돌다보면 한지를 활용한 작품들이나 한국화가 녹아든 퓨전작업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예술가들이 소위 '한국적'이라는 데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지만, 그렇다해도 한국적인 색채가 베어나는 작품들에는 일단 가산점을 주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인 듯 싶다. 김민정 작가 또한 장지에 바탕으로 한국화를 퓨전하여 자신의 세계를 풀어냈다는 점에서 우선 좋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한지 또는 장지는 상당한 영감이 되는 소재이다. 한지가 지니는 여백의 미학은 김민정 작가에게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한지에 수묵적인 흑백이 조화로운 바탕을 이루며 아기자기한 색감들이 포인트로 살아난다. 흐르는 강물이나 구름, 바위 등을 유려한 곡선으로 처리된 한국화 특유의 낯익은 표현법이 작가의 위트와 녹아들어 하나의 짧막한 이야기가 된다.

<표류>나 <Drop> 등은 기억의 물결이 이리저리 마구 뒤섞이며 불어나다 결국은 장마 때의 댐처럼 감당하지 못하고 흘러넘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일상에서 기억되어야 할 것들은 하루에도 산더미처럼 밀려온다. 기억은 점점 섞이기 시작하다 망각되어지기 마련이다. 여기저기 뒤범벅되어 있는 사람과 건물, 자동차 등의 사물 등은 물리적인 크기와는 상관없이 작가에게 중요한 의미에 따라 공간의 크기를 차지한다. 마치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같이 잊혀져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빗방울로 그려낸 <Drop>은 작가의 일상에 대한 감상이 잘 묻어있는 작품이다.

흑백의 색채감은 이미 잊혀졌거나 혹은 잊혀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듯 하다. <모락모락> 등의 작품에서는 살아가며 불현듯 떠오르는 장소에 대한 따뜻한 인상이 남아있다. 삶을 살아가며 어떠한 특정한 장소나 물건들에는 추억이 물들어간다. 완전한 기억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듯, 행복한 추억에도 이들은 빠져나간다. 물밀듯이 밀려오지만 정작 아무리 기억하려해도 기억나지 않고 단지 느낌이나 이미지만이 떠오르는 아쉬움이 동화적이면서도 절제된 채색으로 그려진다.

김민정 작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로 삶의 궤적 속에서 누구나 겪는 아쉬움을 표출한다. 홍수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들어있는 <까만밤>이나 <Starlight>에서는 끊임없이 기억의 비가 내린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하는 것보다는 잊어가는 게 많은 것이 당연하지만, 사람들에게 이 당연함이 너무나도 아쉽다. 기억과 망각에 대한 유감, 다소 추상적일수도 있는 주제를 홍수로 구체화하며 일상의 감상을 전하는 김민정 작가의 전시는 가을이 주는 정취 속에서 추억의 쓸쓸함과 포근한 감성으로 젖어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