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 랭 Nancy Lang, Calendar Girl, March 2010, I Love Marx & Capital, 2009

일시 : 2009.09.02~2009.09.19
장소 : 장은선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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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것도 많고, 쓸 것도 많은 9월의 미술관에서, 오프닝쇼조차 지나간 낸시 랭(Nancy Lang)을 굳이 꺼내든 건 순전히 쌈지스페이스에서 본 작품가격 때문이었다. 대중적인 인지도만 따지면 미술가들 중 아마 백남준 다음으로 위치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녀의 작품가격은 그런 유명세가 어색할 정도로 무명의 신진작가에 비해 별반 나을 게 없었다. 뭐랄까,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달까.

낸시 랭은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는 인물에 속한다. 신중한 사람들은 판단을 유보하려고 애쓰기도 하지만, 전반적인 평단의 시선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자신을 예술가라고 소개하는 그녀의 작품은 차가운 냉대 속에서 잊혀진다. 낸시 랭의 행보를 좋아라하는 대중들조차도 작품에는 별로 관심이 없긴 매한가지이다. 작품만으로 따지면 오히려 미술계가 대중들보다 더 친절했을지도 모른다. 10번의 개인전은 10번의 오프닝쇼만이 남았다.

낸시 랭은 미디어를 농락하며 공생관계를 가졌던 앤디 워홀과 언뜻 비슷한 전략을 취한다. 하지만 앤디 워홀에겐 에디 세즈윅이라는 한 시대를 풍미한 뮤즈와, 작업을 함께 해나갔던 팩토리가 있었다. 게다가 뛰어난 정치감각으로 미디어 뿐만 아니라 평단과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내는 데에도 성공했다. 무엇보다도 앤디 워홀이 견지한 전략의 탁월함은 어떤 순간에서도 '작품을 하는 예술가'로써의 자신을 고갈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참고로 파티를 극단적으로 싫어했으면서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던 걸로도 유명하다. 찍힌 사진들을 보면 대개 오른쪽 사진과 같이 어정쩡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에 반해 낸시 랭은 그 자신이 뮤즈이고, 함께 하는 사람들도 없으며, 평단으로부터도 외면받는 외로운 처지이다.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초대받지 않은 쇼를 하며 부각되었던 그녀는 처음부터 이슈메이커라는 하나의 전략 밖에 없었다. <인간극장>에 출연하며 개인전을 연이어 열었던 때가 낸시 랭의 정점이 아니었을까싶다. 당시 필자는 그녀의 눈에 훤히 보이는 영리함에 경탄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저렇게 자신이 가진 패를 다 꺼내줘도 되는건가하며 우려를 했더랜다. 나중에는 어찌 관심을 끌려하는지. 기억이란 잊혀지기 마련이고, 단순한 호기심이란 한 번으로 족한 것을. 전시제목 "캘린더 걸"에서 <팩토리 걸(Factory Girl)>이 연상된다. 한순간에 모든 시선을 끌었으나 또한 한순간에 잊혀졌던... (이 소박한 비유도 꽤나 논쟁의 여지를 낳을 거 같다. 미리 사과드린다.)

'키티, 키티'를 외치며 발랄함과 귀여움과 섹시함으로 승부하는 낸시 랭은 TV나 국내외전시 등 각종 초청에 불려다니느라 정신이 없다고 한다.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축에 속하는 필자로써는 그녀가 단지 공간을 꾸며주는 그럴 듯한 장식품 이상의 인정을 받고 있다고 믿고 싶다. 낡고 허름해진 장식은 언제라도 버려질 수 있으니... 지인들에게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다. 늙어서도 귀엽기만 하면 추한 거라고. 20대가 지나간 그녀는 다소 위험한 시기에 있는 듯 보인다. 편견이 낳은 전망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쌈지스페이스에서 본 작품가격을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었다.










#2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되어 추가로 글을 덧붙이고자 한다. 다소 이론적인 내용이 될 것 같다.

우선 낸시 랭의 작품이 예술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건 해답이 없는 문제이다. 예술을 넓게 해석한다면 포함되고도 남지만, 협소하게 해석한다면 논란의 여지가 있다. 현대의 미학은 점점 경계를 넓혀가고 있는 추세라서 사실상 포함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리고 예술에 포함된다면 좋은 예술인가 아닌가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고전이론으로만 따진다면 당연히 제외되겠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 기반한 현대미학은 보는 이의 주관적 해석에 보다 무게를 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상황에 따른 맥락성과 관람객에 미치는 영향에 따라 판단이 좌우되기에, 결국 좋은 예술에 대한 문제는 각자의 해석에 남겨진다.

낸시 랭이 과연 팝아티스트인가라고 묻는다면, 부분적으로는 충분히 긍정될 수 있다. 확실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팝아트의 기본요건으로 대개 생각되는 '대중적', '도발적', '미디어친화적'이라는 측면에서 낸시 랭은 기본에 충실한 편이다. 하지만 현재의 입지로 볼 때 그녀의 작품 소재인 그녀 자신이 외국에서까지 '대중적'이라고 보기는 어렵기에 이는 국내로만 한정지어야 할 것 같다.

아울러 낸시 랭의 작업 특성상 자기자신이 뮤즈이자 소재이기에, 그녀 자체가 뮤즈나 소재로써의 가치가 떨어지게 되면 예술가로써의 낸시 랭도 함께 부정될 수 있다는 위험이 남는다. 필자가 앞선 본문에서 언급한 위험이란 바로 여기에 기반한다. 지적이라거나 비평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이 위험은 추후 그녀의 정체성이 송두리채 부정당할 수도 있는 중대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즉 지금은 팝아티스트이지만, 나중에는 아니라고 평가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만 방법적으로는 여전히 논란이 될 수도 있다. 소재와 스타일, 어느 쪽이 핵심이 되느냐에 따라 추후 그녀에 대한 평가가 엇갈릴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