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아, Steal-Life Series, Digital C-Print, 2009

일시 : 2009.08.22~2009.10.25
장소 : 아트선재센터


잊혀진지 오래지만 한 때 TV프로그램의 주도로 '우리 문화재 되찾기 운동'이 한창 열을 올렸을 때를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열강의 식민지 정책 아래, 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주요문화재는 원래의 장소가 아닌 그들의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영국의 "대영박물관"은 인류학의 보고라고까지 일컬어지지만, 따지고 보면 그 모든 전시품들은 다른 나라에서 훔쳐온 것들이 아니던가.

팜플렛에서도 보이듯이 함경아 작가는 '전혀 악의없이' 지난 10년간 레스토랑이나 호텔 등에서 컵이나 그릇 등 사소한 물건들을 훔치거나 바꿔쳐왔다. 이번 전시는 10년간 훔쳐온 작업의 집대성과 같은 개인전으로, 무엇보다도 일단 그녀가 훔쳐온 물품의 갯수에 처음 놀라게 된다. 박물관과 같은 방식으로 구성된 메인테마, <뮤지엄 디스플레이(Museum Display, 2000-2009)>는 중앙에 놓여진 물품들을 중심으로 설명이 곁들어진 사진들이 배치되어 있다. 스타벅스의 머그컵부터 고전적인 은식기까지 전시물품도 다양하다.

훔쳐온 물품들을 화폭에 담은 <스틸 라이프 연작(Steel Life, 2009)>은 서양의 폭력성을 한 번 더 비틀어 보여준다. 우아함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지는 렘브란트를 중심으로 한 플랑드르 정물화가들은 유화의 발명이라는 미술사적 사건과 함께 성장한 이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17세기초는 공교롭게도 국가주의와 제국주의의 가장 초기단계를 살펴볼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함경아 작가는 강렬한 컨트라스트와 색감을 사용하여, 바로크와 로코코시대의 표면적인 화려함 이면에 드리워진 어둠에 대해 고찰한다.


Georges de La Tour, "The Fortune Teller"
메트로폴리탄 뮤지엄(Metropolitan Museum of Art) 소장, 뉴욕(New York)
출처 : 위키피디아


3층의 비디오 전시는 정말 노골적이라서 유쾌함을 준다. 커다란 공간 안에 좌우로 나뉜 영상이 동일한 싱크로 진행되는 <사기꾼과 점쟁이(The Sharper and Fortune Teller, 2009)>는 17세기 화가 조르주 드 라 뚜르(Georges de la Tour)의 회화작업을 부조리극으로 재생산한다. 오른편의 영상은 조르주 드라뚜르의 작업을 네러티브로 재구성하였으며, 좌측으로는 이 네러티브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이 있다. 네러티브의 우아함을 집중하며 바라보던 관객은 불온하거나 폭력적인 장면에서는 시선을 외면해버린다. 표면에 지닌 아름다움 이면에 있는 어둡고 불편한 것들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일반대중의 얇팍한 욕망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사실 이 전시를 소개하는데에는 1주일이라는 숙고의 시간이 필요했다. 치열하다못해 온갖 손짓, 발짓이 모두 다 느껴지는 중견작가의 전시는 흥미로우면서도 우울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비평가들을 위한 '떡밥'으로 생각되는 <어느 날 엄마가 말했다. "너 그러다가 죽을 때 죄 덩어리가 발목에 묶여서 하늘에 못 올라 가는 거, 그거 아니?(One day, mother told me, "You know what, at the last day, mass of your guilt will tie up your ankle and heaviness will pull you down so strongly that you cannot ascend up to the heaven?, 2009)>나 <도둑을 기다리는 욕망의 찌꺼기(Abandoned Desire Waiting for a Thief, 2009)>등은 도덕성에 대해 보다 직접적으로 질문하는 작품들이다. 전시의 테마 상으로는 분명 장소와 역사에 대한 질문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일종의 변명처럼 느껴진다.

과연 일반대중들이 이 전시를 보고 어떠한 평가를 내리게 될까. 단순히 유럽의 대형미술관이 지니고 있는 위선들에 대한 고발이라고 정의내리기에는 영 석연치가 않다. 아트선재라는 공간 자체가 그렇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전시장이며, 국내의 모든 예술가들이 한 번쯤은 다들 꿈꿔보는 장소. 이 전시는 스스로가 지닌 위선에 대한 냉소가 여운으로 남는다. 소위 작가라고 불리우는 예술가의 고고함에 대한 자기파괴적인 비난, 그리고 이렇듯 논란의 여지가 많고 치열한 작업조차도 사회에 아주 잔잔한 파문조차 일으키기 어려운 기성미술계의 마취된 권력에 대한 은유적인 냉소. 어쩌면 필자가 이 전시를 소개하는 데에 이처럼 힘겨워했던 것에는 욕망의 이면에 숨겨진 마취의 힘이 더욱 강력하게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