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였던가 각국의 교육수준을 비교해놓은 글을 본 적이 있었다. 1위가 핀란드였고, 그 다음을 이어 한국이 당당히도 2위를 차지하고 있었더랬다. 어깨가 으슥해질만도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조사결과가 의미심장하다. 학생행복도 조사에서 핀란드는 다시 한 번 1등을 차지했지만, 한국은 꼴찌에 머물렀던 것이다. 지금에 비하면야 널널한 학창시절로 기억되는 필자라지만, 역시 그다지 학교를 좋아했던 것 같지는 않다.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에밀(Emile ou De l'Education)"을 펼쳐들며 충격에 휩싸여야만 했다. 18세기 중반을 살아간 계몽주의철학자의 글에 현재 한국의 교육에서 문제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 이유없이 교육학의 아버지란 별명이 붙은 게 아닌가보다. 250년이라는 세월과 대륙을 넘나드는 혜안을 보다보면, 분명 교육자들은 필수적으로 이 책을 읽을텐데 왜 지금 교육이 이렇게 되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아이를 사랑하라. 그의 놀이와 즐거움과 사랑스러운 천성을 독려하라. 웃음이 항상 입가를 떠나지 않으며, 영혼이 언제나 평화로웠던 그 시기를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왜 당신은 그 천진한 아이에게서 쏜살처럼 지나가는 그렇게도 짧은 순간의 환희와 그들이 남용할 줄 모르는 그렇게도 귀중한 행복을 빼앗으려 하는가? (에밀,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신체와 감관의 훈련 - 다섯 살에서 열 두 살까지', p. 136 ~ 137)

루소는 가장 먼저 어머니에 대한 독설로 포문을 연다. 원정출산, 유아용 영어교재, 난립하는 영재학원 등으로 나타나는 치맛바람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아이들은 태어나기도 전부터 태교나 국적으로 고통을 받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영어에 노출되며, 말을 할 수 있기 시작하는 바로 그 때부터 영재학원으로 보내진다. 영화 <여섯 개의 시선>의 단편 '신비한 영어나라(Tongue Tie)' 엔딩크리딧에서 초등학생에 불과한 아이들이 분노섞인 어조로 자신의 삶을 토로하던 장면이 생각난다. 누가 그 어린 아이들에게 분노라는 감정을 일깨워주었단 말인가.

경쟁 속에서는 필연적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는 사적인 이해가 모두에게 미덕의 가면으로 악덕을 미화하는 것을 가르친다. "나의 행복을 위해 다른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행복을 희생하도록 하라. 모든 것이 나한테만 유리하도록 하라. 나의 고통이나 배고픔의 순간을 덜어주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면 다른 모든 사람을 고통과 가난 속에서 죽도록 하라." (에밀,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도덕과 종교 교육 - 열다섯 살에서 스무 살까지', p. 568)

아이들을 그렇게 닥달하고 못살게 굴면서도 부모들은 자신들의 아이가 자기들에게 잘해주기를 바란다. 어불성설이 따로 없다. 흔히 요즘 아이들 싸가지 없다고 비난하지만, 사실 아이들이 그 싸가지를 어디서 배웠겠는가. 얼마 전 연구조사를 보니, 돈이면 어떤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절반이 넘는다고 한다. 싫어하면서 닮는다라는 말이 있다. 남탓할 때가 아니다. 싫든 좋든 아이들은 부모를 보며 행동하기 마련이다.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고, 비록 그들의 부모라 할지라도 자신을 힘들게 하면 미워하기 일쑤인 부모들을 바라보는 아이들에게 타인에 대한 배려나 부모에 대한 효도를 기대한다는 건 비합리적인 과욕에 불과하다.

가정교사는 벌써 완전히 형성되어 있는 인공의 배아를 발육시키는 일을 완성하는데, 그 아이에게 자기 자신을 아는 일, 자기 자신을 활용하는 일, 사는 법을 배워 행복해지는 일만 제외하고 모든 것을 가르친다. (에밀,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신체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는 양육 - 유년기의 에밀', p. 82)

마치 학교와 학원, 그리고 과외가 신처럼 떠받들어지고 있다지만, 루소는 부모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아무리 좋은 교육자도 결코 아버지에 따를 수 없음을 역설한다. 아무리 애정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들에게 결국 아이들은 남에 불과하다. 부모처럼 자신의 아이들을 아껴주면서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태어나자마자 아이들은 남들의 손에 맞겨진다. 맞벌이를 하며 열심히 일하는 부모들은 교육에 그 돈을 모두 쏟아붓는다. 아무 가치없는 낭비라는 바로 이럴 때 쓰라고 하는 말인 것 같다. 모두들 열심히 살지만 성과가 없다. 차라리 덜 열심히 살면서 낭비되는 교육예산만 줄이더라도 삶은 훨씬 더 윤택해질 수 있지 않을까. 대안학교나 뜻있는 부모들 사이에서 사회적 공감대가 조금씩 형성되어 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아직은 걸음마 단계에 불과한 것 같다.

어떤 공부들지 간에 표현되는 것들의 관념이 없으면 표현하는 기호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언제나 그 기호만 아이에게 가르칠 뿐 그 기호가 표현하는 것을 전혀 이해시키지 못한다. (에밀,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신체와 감관의 훈련 - 다섯 살에서 열두 살까지', p. 193 ~ 194)

'공부해라', '공부해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하지만 정작 부모들은 공부한다는 의미를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고 그런 말을 하는건지 의문이 든다. 수없이 많은 지식들이 아이들에게 쏟아진다. 하지만 정작 그 지식들을 왜 알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헛똑똑이'라는 말도 있듯, 무의미한 지식처럼 쓸모없는 게 또 없다. 중고등학교 때 그렇게 많이 배웠던 지식들이 다 어디에 쓸모가 있는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외우고 공부하느라 정신없었던 필자는 대학에 와서 휴학을 했을 때야 비로소 스스로 찾고 묻기 시작하면서 공부의 즐거움과 의미를 뒤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어쩌면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교육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진실한 선행은 결코 배은망덕을 만들지 않는다. (에밀,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도덕과 종교 교육 - 열다섯 살에서 스무 살까지', p. 418)

루소는 실로 교육을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측면에서 접근한다. 아이들을 열심히 양육한 부모들은 꼭 아이들이 자라면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라면서 티를 낸다. 아무리 좋은 선행도 티를 내기 시작하는 순간 가식적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눈에 훤히 보이는 과도한 투자는 아이들에게 부모에 대한 부담만을 남길 뿐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의 사교육을 다룬 편에서 어떤 여학생은 자신을 유학보내려다가 빚더미에 앉은 가족들에게 '누가 그렇게 해달랬냐'며 차디찬 한마디를 던진다. 그 여학생이 지닐 가족에 대한 부채의식은 상상조차도 하기 싫다. 필자의 주변에서도 가족의 기대와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고, 이는 한국에 사는 모든 자녀들이 지닌 공통적인 고민일지도 모른다.

장래에 대한 생각! 그것은 우리를 끊임없이 미래로 이끌어 우리가 전혀 이르지 못할 그곳에 우리를 자주 데려다놓는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불행의 근원이다. (에밀,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신체와 감관의 훈련 - 다섯 살에서 열 두 살까지', p. 143)

포이에르바흐가 사후에 대한 생각이 현재를 가로막는다고 생각한다면, 루소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생각이 현재의 즐거움을 빼앗아간다고 이야기한다. 앞서 제기한 모든 문제들이 미래에 아이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아이들은 부모들이 키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라는 것이다. 아무리 울타리를 치고 가르치려고 해봐야, 스스로 배우려하는 의지와 즐거움이 생기지 않는다면 다 헛된 일에 불과할 뿐이다. 공자께서도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 好之者, 不如樂之者. - "논어(論語)" '옹야편(雍也篇')'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미래를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라 현재를 즐길 줄 아는 현명함이다. 루소의 <에밀>은 비단 교육자들뿐만 아니라, 아이를 가진 혹은 아이를 가지려는 모든 아버지, 어머니들께 권하고 싶은 책이다.